“정치는 야누스의 두 얼굴”.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1917~2014)의 말이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한 몸에 두 얼굴을 지닌 ‘문(門)의 수호신’이다.

뒤베르제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책(배영동 역‧2006년 나남 출판사)에서 ‘투쟁과 통합’이라는 정치의 양면성을 이야기했다. 거기서 정치를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고 표현했다.

책의 속살에 관계없이 표제만을 빌려다 쓴다면 ‘야누스의 두 얼굴’은 현재 한국의 정치인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한국정치인의 앞과 뒤가 다른 이중성, 겉과 속이 같지 않은 표리부동(表裏不同), 막말과 거짓말, 온갖 협잡과 추잡스런 행태가 ‘야누스의 두 얼굴’에 감춰져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치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관통하며 오늘까지 내려오는 삶의 영역이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본시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이론은 오늘에도 유효한 정치담론의 논거가 되고 있다.

예부터 내려오는 고매한 정치적 변설(辨說)이나 주장은 대나무 밭의 대나무처럼 즐비하다. 성현들의 말씀이나 지식이 빼어난 학자들의 서책에도 정치담론은 빼곡하게 차고 넘친다.

정치 논리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얼키설키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이다. 그만큼 한 마디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고매한 정치 논리를 떠나 쉽게 말하자면 ‘정치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인 것이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정치정야(政治正也)’라 했다. ‘정치는 올바르게 하는 것, 정의롭게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이뤄 공익을 정의롭게 실현 하는 것‘이라는 교과서적 정치의 정의를 긍정한다면 공자의 말씀은 오늘에도 귀담아 들을만한 교훈이다.

국가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담아낸다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이나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한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다.

공정과 정의, 신뢰와 책임감,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 등등은 이러한 정치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정치지도자 또는 정치인에게는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간의 이해를 조정하여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정의 실현 따위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이 같은 역할은 현실정치에서 찾아볼 수 없다. 공허한 이상론일 뿐이다.

구두선(口頭禪)으로 끝나거나 공염불(空念佛)로 그치기 일쑤다.

정치인 각각의 정치적 욕심이 정치이상론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요즘 국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보여주는 여야 의원들의 위선과 이중성, 역겹고 비루한 말 바꾸기 행태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카멜레온 식 변절이나 말 바꾸기는 정치혐오와 정치 불신의 주된 원인이다.

거기에는 거짓말이 숙주처럼 매달려 있고 탐욕은 그들의 자양분이다.

단적인 예가 ‘윤석열 검찰 총장’에 대한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의 입장 변화다.

지난 7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은 윤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살아있는 권력 비리도 엄정하게 수사 해 달라”고 당부했었다.

윤총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와 기대는 대단한 듯 했다.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이에 앞서 검찰총장 청문회 때 ‘검찰개혁과 검찰독립의 아이콘“이라고 칭찬하며 옹호했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확고하게 강화하는 데 기여할 적임자, 이만한 사람 또 없다”고 치켜세우기에 급급했었다.

그러던 대통령과 집권여당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검찰’이 ‘조국 일가 비리의혹 수사’에 나서자 태도가 표변했다.

대통령은 윤총장을 따돌리며 완곡 화법으로 압박의 입김을 보냈고 청와대, 여당, 여권은 화력을 총동원하여 윤총장 때리기에 나섰다. 융단폭격이나 다름없는 전 방위 공격이었다.

‘검찰 개혁의 아이콘’을 하루아침에 ‘검찰개혁 적폐 대상‘으로 몰아 매타작을 한 꼴이었다.

지난 17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보여 준 여야 국회의원들의 ‘야누스 적 두 얼굴’은 보기에 민망하고 낯 뜨거웠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당시 보여 줬던 여야 의원들의 태도가 국정감사장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

‘후안무치(厚顔無恥) 정치‘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스웰(1902~1978)에 따르면 “권력형 인간들은 우리(Us)가 아닌 나(Me)의 가치를 추진하는 데 완전히 골몰해서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권력지상주의 가치관’, ‘강력하고 무한한 권력욕’, ‘권력중심의 역사관’을 가진 사람을 ‘정치적 인간의 특징’으로 정리했다.

‘정치적 인간’은 “객관성이나 합리성에 개의치 않고 역사를 자신의 편의에 따라 해석하거나 극단적 이기심과 편향된 가치관의 소유자”라고 분석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이에 근거하여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에 곽란(癨亂)을 일으키고 있는 정치‧사회적 갈등과 분열과 혼돈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핵심과 권력의 단맛에 기생하는 집권세력의 일탈이 빚어낸 것이다.

말을 돌릴 필요가 없다.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대통령의 인지능력 부족이 문제다. 무능과 무지와 무모한 국정운영이 대통령의 인지 능력과 짝패를 이룬 것이다.

국정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쉴 새 없이 경고음이 들려오는 데도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이 없다.

제어능력을 상실한 청와대 참모진, 국정의 동반자라는 집권여당의 권력 눈치 보기가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낸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고위직 인사에 대한 대통령의 독선과 오기, 편향적 민심 파악, 추락하는 경제, 외교안보의 무능 등 정권의 총체적 위기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여기에다 정치는 실종 된지 오래다. 악다구니만 살아 시끄럽다. 맨 날 패당 싸움의 막말정치가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불안하다. 불만의 소리가 높다.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귀를 막고 있다. 눈도 감았다. 청맹과니거나 오불관언(吾不關焉)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서울의 광화문과 서초동 등의 광장에서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어 내지르는 ‘민심의 함성’은 이렇게 ‘눈감고 귀 닫은 정권’에 보내는 절박한 퍼포먼스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 핵심부와 집권여당과 여야정치권에 보내는 경고의 함성인 것이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이를 모른 채한다면 언제 광장의 성난 군중 함성이 쓰나미가 되어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치권을 초토화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엄포가 아니다. 어떤 정부도, 어느 권력자도 국민의 여론을 비켜 갈 수 없다. 민심을 거슬러 성공하거나 살아남은 정권은 없다.

비유하자면 강물은 백성(국민)이고 배는 위정자(정치권력)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 엎기도 한다’. 옛 중국의 고사는 오늘에도 유효한 정치 경구(警句)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