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저버리고 정도(正道)를 벗어나 권력에 빌붙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지식 또는 학문의 무리'를 '어용(御用)지식인' 또는 '어용학자'라고 한다. 일반적 사회인식이 그러하다.

한자어의 '어(御)'는 다스린다는 뜻이다. 왕조시대의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임금이 필요에 따라 쓰는 일을 '어용(御用)'이라 했다.

'국립 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에는 '어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자나 권력 기관에 영합하여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 했다.

어용지식인, 어용학자, 어용노조, 어용언론, 어용단체 등등 권력에 빨대를 꽂아 기생하는 '어용'들이 판치고 있다는 세상의 소리가 거칠다. '어용'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지식인과 지성인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한 듯하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일맥상통하지만 '같은 듯 다른 존재'여서 그렇다.

지식인은 '일정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거나 일정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은 생활의 수단이자 기술이다. 지식은 누구나, 그리고 아무나 노력에 의해 쌓을 수 있다.

지성인은 이러한 지적 수준에 뭔가가 덧붙여진 사람이다. '뭔가'에는 '양심과 진실'이라는 속살이 있다.

양심에 따라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에 항거의 목소리를 내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행동하는 양심'인 것이다.

지식을 갖추었다고 다 지성인인 것은 아니다. 양심과 진실의 담보가 필요한 것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되고 품격을 잃어버리면 이미 지식인이 아니다. 위선자이거나 사이비 또는 얼치기 지식인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권력과 세속에 아첨하여 학문을 왜곡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지식인이 아니라 바른말 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정직한 지성인이 필요한 시대다.

20세기 최고 지성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장폴 사르트르(1905~1980)는 '객관적 지식을 활용하여 현행 체제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지성인의 소명'이라했다.

그의 빼어난 담론을 정리한 '지성인을 위한 변명'에서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지성인에 대해 명쾌하게 정의했다.

'자기일이 아닌 남의 일(사회적 모순 해결)에 뛰어드는 자'라고 했다.

'남의 일에 뛰어드는 것'은 무조건적 상황개입이나 줏대 없는 참견 또는 간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와 공정, 자유와 진실 등 인간 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짓밟히고 왜곡 될 때 지성인은 방관자적 자세를 버리고 분연히 일어서서 투쟁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의 '지성인을 위한 변명'은 이어진다.

'자신을 가꿀 줄 알고, 시대의 잘못을 읽을 줄 알며, 체제 순응보다 당당히 비판하며 사회 보편적 가치들을 위해 투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통해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피지배계급의 입장에 서거나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경우에만 '지성인의 소명'을 담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대의를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 권력의 일탈에 대항해 핍박과 수난도 감수하며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는 자'가 지성인이라는 것이다.

'긍극 적으로 볼 때 정치․사회적 모든 갈등은 서민일반(피지배계급)에 대한 권력(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지성인은 이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였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지성인은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추구하고 양심과 정의를 위해 악에 저항하는 의로운 사람'이다.

이러한 의인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사정은 녹록치 않다.

사회가 혼돈(混沌)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과 권력은 착종(錯綜)됐고 양심과 정의는 등진지가 오래다.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얼치기 지식인이 사회 정의와 공정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기 때문이다.

소위 '조국 사태'가 불러온 사회적 혼돈이다.

그래서 양심을 일깨우는 천둥소리 같은 '지성의 울림'이 그리운 것이다.

죽비처럼 잠자는 이성을 두드려 깨우는 숙성된 '참 지성의 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징소리 같은 맑고 깨끗하고 도도한 '지성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용의 나팔 소리'만 세상을 시끄럽게 할 뿐이다.

유시민(60․노무현재단 이사장)도 시끄러운 '어용의 나팔수다.

유이사장은 문재인정부가 출범하기 직전 "문재인 정부의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커밍아웃했다.' 2017년 5월 5일 한겨레TV에서다.

당시, 차기정권에서 맡고 싶은 역할에 대해 "제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게 무조건 편들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정말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비판하고 또 제대로 옹호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다"라고 했었다.

'어용지식인 유시민'.

그에게는 '꽤 재주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한다. '잡학박사 타이들의 예능인' 답게 현란한 교언영색과 말장난으로 대중을 즐겁게 하는 재주다.

노무현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 국회의원을 지냈다.

경제학 전문가, 민주투사, 방송토론의 달인, 시사평론가, 베스트셀러작가, 잡학다식으로 대중적 인지도도 높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진영에 따라 양 극단이다. 긍정적 평가 못지 않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한 부정적 성토도 많다.

같은 진영 내에서도 그의 가벼운 언동을 나무라는 목소리도 많다.

"옳은 소리도 싸가지 없이 한다"는 말도 거기서 나왔다. 이때부터 '싸가지'는 그의 다른 이름으로 통했다.

이를 빗대 최근에는 그의 말에 대해 "옳지 않는 말도 싸가지 없이 한다"는 반대 진영의 비판이 거세다.

'조국 사태'와 관련한 그의 일련의 발언은 그가 스스로 밝혔던 '어용지식인의 언어'가 아니었다. 현실인식이 실종된 인지부조화의 '싸가지 없는 억지 궤변'이라는 비판이 거칠었다.

'히틀러에게 괴벨스가 있었다면 조국(曺國)에겐 유시민이 있다"거나 '곡학아세의 끝판 왕', '온갖 궤변으로 비상식의 상식화를 도모하는 야바위꾼' '악취 나는 선동' 등등 그를 향한 정제되지 않는 반대진영의 맹비난은 살똥스럽기만 하다. 그의 '싸가지 언어'가 불러들인 악담이다.

스스로를 '문재인 정부의 어용지식인'으로 자처하며 '조국 수호'의 전위역을 담당했던 그에게 돌아온 일반의 평가는 이렇게 야속하다.

"무조건 편들기 보다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비판하고 제대로 옹호하겠다"던 그의 어용지식인 역할이 얼치기나 싸구려 지식으로 폄훼된다면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닐 터이다. 그로서는 구정물을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

유이사장만이 아니다. 유이사장과 그의 아류(亞流)인 공지영,이외수 등 이른바 진보지식인들의 풍화되지 않은 일련의 '조국수호 발언'도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용지식인들의 집단 발작을 보는 듯 했다. 비유는 천박했고 논리는 악다구니 수준이었다. "하수구처럼 냄새가 역겨웠다"는 비판도 많았다.

이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논리에 취해 정권이 흐린 판단을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라가 정상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큰일이다.

이들 어용지식인들에게 제발 제대로 된 어용활동을 주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의 단물도 좋지만 집권자나 집권세력에게 듣기 거북한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아야 '유시민 식 어용지식인'이라도 되는 것이다.

정권의 잘못에도 '싸가지 없는 말'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어용지식인(?)'란 말을 들을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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