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현실 속에서 평화를 위해 앞으로 귀코무덤(미미하나쓰카)의 역사, 존재가 풍화되지 않게, 올바르게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위령을 해나겠습니다."

지난 11월 7일 쿄토 미미즈카에서 열린 '제13회 미미즈카위령제'를 마치고 사단법인 <겨레얼 살리기활동 국민운동본부> 박재희 이사장이 인사말이었다.

몇 년전까지만 하드라도 8월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 개최되어 참가자들로부터 불평을 샀었다. 그래서 11월로 변경된 연중행사 위령제가 맑게 개인 만추의 쿄토에서 약 150명의 참가 속에 열렸다.

한국 전통 제례 속에 초헌관에 박재희 이시장, 아헌관에 주오사카 오태규 총영사, 종헌관에 김정홍 민단본부 단장과 박청 민단 오사카본부 부단장의 집행 속에 진행되었다.

헌다(獻茶)에는 윤도심 다도가, 염불에는 샤카 하쿠신 일본 죠도슈쇼메이데라 주지 스님, 위령무에는 '쿄토한국전통예술원' 김일지 원장외 8명이 참가했는데 3명이 일본인이었다.

미미즈카는 또 하나의 아픈 역사의 순례지이다. 4백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과 명나라 군인들의 코를 베고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갖고 왔다.

당시 자료를 보면 조선인 코, 약 18만 5천개, 명나라 군인 코, 약 2만 9천개, 합계 약 21만 4천개였다. 갖고 오는 도중에 부패 방지하기 위해 소금과 술에 절이고 갖고 와서 미미즈카에 묻힌 것은 약 2만개이다.

처음에는 '코무덤(비총:鼻塚:하나쓰카)'이라고 불리웠으나 토요토미 히데요시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시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코무덤'이라면 너무 야만적이기 때문에 귀무덤(귀총:耳塚:미미즈카)고 쓰기 시작해서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다.

토크가와시대에는 이 무덤을 방치해서 조선통신사가 쿄토에 들렀을 때는 보이지 않게 막을 치고 가리기도 했지만 메이지시대부터 보전에 힘을 기울였다.

미미즈카는 1597년에 만들었는데 이 사실을 안 관할 지역인 "민단쿄토동산지부'가 400년이 되는 1997년에 김동출 지단장을 중심으로 처음으로 위령제를 지냈다. 지금은 여러 단체들이 위령제를 지내고 있고, 동포는 물론 일본인과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서 역사의 산 현장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한해도 빠지지 핞고 계속 참가하시니 대단하십니다." "제사는 한번만 참가하는 것이 아니고 매년 참가하는 것입니다." 미미즈카 위령제에 빠지지 않고 계속 참가하는 필자에게 가끔 참가하는 사람의 말이다. 어떤 사람은 한번 참가했으니 그것으로 끝이라는 사람도 있다.

위령제에 참석할려면 아침 8시까지 민단 오사카본부에 가서 대기하는 버스로 쿄토에 가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위령제에 참가할 수 있다. 약 한시간 반쯤의 위령제가 끝나면 주최자측의 점심 제공이 있는데 그 식사를 마치고 오사카에서 간 일행은 쿄토문화 탐방이 있다.

몇년 전에는 식사 마치고 바로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버스를 빌고 모처럼 코토까지 갔는데 바로 돌아오면 아까우니, 코토문화 탐방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마치고 오사카로 돌아오면 오후 5시를 넘어서 하루 행사가 되고만다. 토,일요일도 아닌 평일 날에 좀처럼 참가할 수 없는 행사이다.

그러나 오래만에 찾아가는 미미즈카와 우리 고유의 전통 제례와 위령무 속의 헌화는 일상을 벗어난 마음에 안정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올해는 위령제가 끝나서 찾아간 쿄토문화 탐방은 도시사대학 윤동주, 정지용 시비 순례였다.  

약 50명이 참가한 오사카 일행 속에서 필자는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생애와 시비 건립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고 윤동주 시 '서시'를 낭송했다. 퍽 의의 있는 문학탐방이었다.

그런데 이 위령제에서 언제나 안타까운 것은 오사카에서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동포만이 아니고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거나 친한 일본인이 있으면 같이 참가하라고 언제나 권하고 잇지만 그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들만이 위령제가 아니고 일본인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필자는 언제나 일본인과 같이 위령제에 참가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