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는 예수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른바 ‘오병이어(五餠二魚)기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황당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뻥 튀긴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신앙인 입장은 다릅니다. 2000여 년 동안 ‘믿을 교리’로 마음에 깊이 새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적(奇蹟)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인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시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변변치 못한 주제꼴로는 논의의 곁불 쬐기도 가당치 않습니다.

다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흔쾌하게 와 닿지 않는 불편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는 고백을 하고 싶은 것입나다.

솔직히 말하자면 5000명을 먹이고 남은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탓일 테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상황을 각색하고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리석게도 ‘기적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교만에 빠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계몽주의 신학자들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기적에 대한 해석’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18~19세기를 살았던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신학자 H,E.G 파울루스 등의 해석입니다.

이들은 ‘수많은 군중들이 이미 각각 자기가 먹을 것을 챙겨왔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욕심이 많고 이기적인 어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거나 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꼬맹이(어린이)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저 없이 선뜻 내놓았던 것입니다.

이를 본 어른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꼬맹이한테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겠지요.

그래서 쭈뼛쭈뼛 엉거주춤하던 어른들이 주섬주섬 옷 속에 감춰 챙겼던 빵과 고기를 내놨을 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광주리는 넘쳐났고 먹다 남은 빵이 열 두 광주리를 넘치게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감출 것 없는 어린아이의 맑고 순수한 마음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어른들이 뒤늦은 십시일반(十匙一飯)이 기적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나름의 ’소설적 상상력‘이 스스로 대견해 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가 빵과 고기를 만들어낸 기적 못지않게 어린이의 순수한 나눔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여 가진 것을 내놓게 했다면 이 역시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눔의 기적’인 것입니다.

날씨가 싸늘해 졌습니다. 차가운 몸과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감싸주는 인정이 그리운 것입니다.

최근 한 공중파 방송에서 전해진 배가 너무 고파 마트에서 음식을 훔쳤던 ‘30대 아버지와 열두 살 아들의 이야기’는 사회에 일깨워주는 바가 큽니다.

지난 10일 인천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마트에서 우유 두 팩 등을 훔치다 적발됐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뇨병 등의 지병으로 여섯 달이나 일을 못했다고 했습니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되었지만 네 가족이 생계를 꾸리기엔 너무나 힘든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도 아침 점심을 굶었습니다. 베고픔에 지쳐 그만 우유 등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고 마트주인에게 울며 용서를 빌었다고 했습니다.

사정을 들은 마트 주인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고 출동한 경찰도 이런 사정을 알고 훈방조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아버지와 아들을 인근 식당으로 데려가 국밥을 시켜 먹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트 상황을 지켜봤던 한 시민이 현금 20만원이 든 봉투를 내놓고 신원도 밝히지 않고 홀연히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알려지자 지역의 복지센터는 아들에게 무료 급식카드를 지원하고 아버지의 일자리도 소개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마트 주인도 쌀과 부식 등 생필품 지원의사를 밝혔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이 수 만 톤인 현실에서 아직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이는 지난번 굶어 죽은 탈북 민 모자의 사연과 함께 가슴이 먹먹하지만 부끄러운 복지 국가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다.

그나마 배고파 음식물을 훔친 아버지와 아들에게 보냈던 따뜻한 인정을 보면서 그래도 아직 사회는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마음이 기적을 만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마음의 힘이 신비한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배고파 음식물을 훔쳤던 아버지와 아들에게 보냈던 이들의 따뜻한 인정도 마음에서 우러난 작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기적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지옥을 경험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신비의 힘이자 기적인 것입니다.

아인스타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물론 행복은 후자가 만들어 낸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기적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가진 것을 조끔씩이라도 나누면 주의는 보다 따스해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기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연말연시는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 돕는 절기입니다.

제주지역에서도 각계각층에서 ‘나눔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희망 2020년 나눔 캠페인’도 여기에 속합니다. 2019년 11월20일부터 2020년 1월 31일까지 진행되는 행사입니다.

이 기간 47억8천2백 만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11억6천71만5356원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목표액 달성을 나눔 온도 100도로 잡았을 때 지금의 따뜻한 나눔 온도는 24.3도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나눔 행사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여 온기를 더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적은 멀리 없습니다. 나눔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5000명이 먹고 남았던 성경의 ‘오병이어 기적’은 조그만 고사리 손이 내민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작지만 순수하고 따뜻한 손길, 겨울을 녹이는 그런 손길이 그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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