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사랑의 계절’이라 했습니다. 수녀 시인 이해인 님이 그랬습니다. ‘12월은’이라는 시(詩)에서입니다.

‘12월은

우리 모두

사랑을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잠시 잊고 있던

서로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하며

고마운 일 챙겨보고

잘못한 일 용서청하는

가족 이웃 친지들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벗으로 가족으로 다가가는

사랑의 계절입니다‘

그렇습니다. 12월은 그런 사랑의 계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한 해 나의 이기적인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기회입니다.

무관심하고 멀어졌던 이웃에게 다가가 따뜻한 손길은 나누는 계절이었으면 합니다.

2019년 한해, 우리의 삶은 너무나 팍팍하고 각박했습니다. 삶 속에서는 온기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내 욕심만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 왔습니다. 핏발이 선 눈 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무자비한 생존경쟁은 옆을 보거나 주위를 살펴 볼 여유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칼바람처럼 미움과 증오는 날이 섰습니다. 반목과 질시가 소용돌이 쳤습니다.

갈등과 분열은 국가 공동체의 운명을 발기발기 찢어버렸습니다. 되돌아 본 일 년이 그랬습니다.

지난 주 교수신문이 발표한 ‘2019년 사자성어’인 ‘공명지조(共命之鳥)’는 이러한 국가 상황에 대한 경고음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전국 대학교수 1046명의 설문조사로 선정되었습니다. 설문참가 교수 33%(347명)이 선택했습니다.

‘공명지조’는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입니다. ‘아미타경’ ‘잡보장경’ 등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새입니다.

한 쪽 머리가 잘못되면 다른 쪽 머리도 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의 새입니다.

목숨을 공유하는 새, ‘공명지조’는 서로 다투거나 싸우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두 개의 머리가 서로 질투하여 자기만 살겠다고 다른 쪽에게 독약을 먹였다가 둘 다 죽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죽은 것은 머리만이 아닙니다. 몸통까지 함께 죽었습니다.

지금 나라사정도 다를 것 없습니다. 국민은 둘로 나눠졌습니다.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 갈등이 국민을 갈라놓았습니다.

심하기는 정치권이 더합니다. 여․야로 갈리어 당리당략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진흙탕 개싸움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국민은 안중에 없습니다. 거덜 나는 경제, 놀림감이 되고 있는 대북관계나 안보 외교 위기 등 추락하는 나라사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야바위 같은 꼼수 정치, 제 욕심만을 위해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 지저분한 정치적 협잡과 야합이 밑 가리개도 없이 까발려 지고 있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타도해야할 적으로 간주하는 증오의 정치가 나라를 멍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거품 무는 인신공격과 하수구처럼 악취풍기는 말말 퍼레이드, ‘너는 죽고 나만 살겠다’고 독을 뿜었다가 결국 함께 죽는 ‘공명지조’ 상황이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브레이크 없는 광란의 질주가 계속된다면 나라는 버티기가 힘듭니다. 언제 붕괴 될지 모릅니다. 공멸의 신호입니다. 그래서 제어장치를 찾아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의 중독(中毒)현상을 치유할 해독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처방전을 받아야 할 까요.

감히 말하자면 처방전은 ‘사랑의 묘약’에 있습니다. 그것이 해독제(解毒劑)입니다.

이해인 님의 시를 서두에 인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사랑의 묘약’을 제조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로 든 시에서도 ‘서로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는 서로를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잘못한 일에 용서를 빌고 상대의 고마움을 챙기며 벗으로 가족으로 다가가는 사랑의 계절을 노래 한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엘리 위젤(1928~2016)의 말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예술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이단(異端)이 아니고 무관심이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고 무관심이다’.

엘리 위젤의 말을 역으로 색인한다면 ‘사랑은 관심’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과 정신을 발전시킨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가치가 ‘사랑’이라면 ‘무관심’은 이를 좀먹는 독(毒) 바이러스 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 갈등과 분열의 ‘공명지조’ 상황에서 탈출할 ‘사랑의 묘약’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관심을 갖는 일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무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에 ‘무슨 씨 나락 까먹는 헛소리냐“는 힐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 갈등의 치유제로 사랑타령을 하는 것도 생뚱맞은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말과 마음과 실천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의 시작이 상대를 인정하고 관심을 갖는데서 출발한다면 시도해 볼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내편 네 편의 대치국면에서 우선 상대를 인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상대를 인정하면서 서로 관심을 보이는데서 활로를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 적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사랑에 대한 유명한 성서 구절(가톨릭 성경 1코린도 13장 4~7)을 함께 음미해 보고 싶습니다.

갈등과 반목, 미움과 증오를 뿜어내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옹졸한 고집에 사로잡힌 완고한 마음에 전류처럼 찌르르 흐르는 시랑의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마침 모레(25일)는 인류구원을 위해 사랑을 실천했던 예수가 태어난 크리스마스입니다.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날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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