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병원과 제2공항... 2019년 제주 지역사회의 화두는 단연 '공론화'였다. 제주투데이는 2019년 올해의 인물로 박찬식 제주 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을 선정했다. 박 실장과 비상도민회의는 제2공항 도민 공론화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그들의 노력은 제주도의회 제2공항 갈등해소 특별위원회 구성으로 이어졌다. 제주투데이는, 새해에 정부와 제주도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기를 기대한다.<편집자 주>

지난 30일 오후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주시 아라2동 주민자치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30일 오후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주시 아라2동 주민자치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사람들 저마다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있죠. 이걸 바탕으로 인연이 작용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찌어찌해 코가 꿰고 하면서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는 거죠. 제가 지금까지 걸어오고, 또 앞으로 걸어갈 길도 인연에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0일 오후 제주시 아라2동 주민자치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56). 한 달여 전 단식 농성을 끝낸 그의 얼굴 윤곽은 예전에 비해 한층 짙어져 있었다. 

건강 상태를 묻자 박 상황실장은 “체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괜찮다. 오히려 원래 살이 너무 쪄있었는데 빠져서 더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지난 10월31일부터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 농성장에서 16일간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 제주도의회 의회운영위원회(위원장 김경학)가 제2공항 건설과 관련해 도민 공론화를 지원하는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심사 보류한 날이었다. 

이처럼 박 상황실장은 올 한해 제2공항 건설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국토교통부와 반대 여론에 귀를 닫은 제주도, 도민 갈등을 방관하는 청와대를 규탄하는 현장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제주투데이가 ‘2019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이유다. 

인터뷰 내내 그는 “‘제2공항’은 제주 사회 전체가 맞닥뜨린 현안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앞에 있었던 건데 ‘나’라는 개인의 이슈가 부각되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조심스러워 했다.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왼쪽)과 박찬식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오른쪽)이 미 대사관에 공식서한을 전달하고 있다.@사진제공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지난해 4월9일 당시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왼쪽)과 박찬식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오른쪽)이 ‘제주 4.3에 대한 미국 정부의 사과와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미 대사관에 전달하고 있다. (사진=제주투데이DB)

#육지사는 제주사름 대표부터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까지

제2공항 반대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때는 지난 2015년 성산읍이 제2공항 예정 부지로 선정되고 나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2016년이다. 그는 수도권 지역에 사는 제주출신 모임인 ‘육지사는 제주사름’ 대표를 지내며 서울에서 제2공항을 비롯해 4·3, 강정 등 지역 현안에 대한 지원을 꾸준히 이어왔다. 

“제2공항 문제가 시작한 2015년, 2016년 이때는 어떻게 보면 제주도가 지난 20~30년 걸어온 국제자유도시나 대규모 관광개발 중심의 길들이 가진 ‘그림자’라고 할까요, 폐해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지점이기도 했어요. ‘이 길로 가면 지금까지 알던 제주도가 그대로 남아있을까’하는 걱정 때문에 당시 살고 있던 서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대 운동을 지원했죠.”

박 상황실장의 표현에 따르면 지난해는 제2공항에서 살짝 ‘비껴선 시기’였다. 4·3이 70주년을 맞은 해에 제주4·3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4·3을 전국화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50주년 당시엔 못했던 미제의 문제도 있었고요. 정말 마음 먹고 모든 걸 던졌습니다. 욕을 먹든 어쨌든 제대로 판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요.”

지난 30일 오후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주시 아라2동 주민자치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30일 오후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주시 아라2동 주민자치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제주 귀향 만 1년…“인연이 투쟁 동력”

박 상황실장이 본격적으로 제2공항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제주에 내려온 때는 딱 1년 전인 지난해 12월30일이었다. 같은 달 15일 자신이 검토위원으로 참여했던 ‘제2공항 입지선정 타당성 재조사 검토위원회(1차)’ 활동이 강제 종료되자 내린 결정이었다. 

“12월17일에 성산읍 주민 김경배씨가 검토위 중단에 항의하며 단식을 시작했잖아요. 그 상황에서 더는 이대로 당하고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귀향을 결심하고 제주도에 지낼 방을 구했죠. 어떻게 보면 국토부가 서울에 있는 저를 걷어차서 여기까지 오게 한 겁니다. (웃음)”

이후 그가 1년을 꼬박 제2공항 반대 현장의 최전선에 있었던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인연(因緣) 때문이었다. 뜻(인)을 함께 하는 사람들(연)이 동력이 돼 그가 가진 의지(인)를 더욱 굳게 하고 또다시 사람들(연)과 연대해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연 따라 굴러온 거예요. (웃음) ‘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동기)이고 ‘연’은 외부적인 것(사회적 관계)이거든요. 연이 계속되면 인이 새겨지고, 또 인에 따라 연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 천막 농성장에서 단식 투쟁 중인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 그는 지난 10월31일부터 11월 15일까지 16일간 단식을 이어갔다. (사진=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제공)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 천막 농성장에서 단식 투쟁 중인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가운데). 그는 지난 10월31일부터 11월 15일까지 16일간 단식을 이어갔다. (사진=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제공)

#검토위원 활동 거치며 공론화에 확신

지금 제2공항에 모든 걸 쏟아붓는 그에게 이 싸움의 시작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검토위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검토위에 참여하는) 전문가들과 비교해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책임이 무겁기도 했고요. 하지만 더 두려웠던 건 모르면서 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는데…. 알면 알수록 ‘이건 아니다’ 하는 확신이 드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할 얘기가 없어진 거죠.”

박 상황실장은 “제2공항 사업이 이렇게 진행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라며 “‘개인의 양심을 걸고서라도 용납 못 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다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또 검토위원 활동을 통해 “제가 그랬듯 도민들에게 사업 내용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든 제2공항 추진 과정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바로 올 하반기부터 제주 사회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숙의형 민주주의 ‘도민 공론화’이다.

“공론화라는 의제는 갑자기 나온 게 아닙니다. 검토위 활동 재개 후 검토위 권고안과 재조사 용역 결과, 공론화 이 세 가지를 종합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공론화를 가장 중요하게 봤어요. 용역 결과는 국토부의 입맛대로 나올 거고 검토위의 단일 권고안이 나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요.”

원희룡 제주지사(왼쪽)와 박찬식 상황실장(사진=KBS 영상 갈무리)
지난 9월4일 오후 원희룡 지사(왼쪽)와 박찬식 상황실장(오른쪽)이 KBS제주방송총국에서 열린 제2공항 관련 제2차 TV공개토론회에서 1대1 토론을 벌이고 있다. (사진=KBS 영상 갈무리)

#“국토부의 일방 추진 막을 수 있는 건 결국 도민”

박 상황실장은 “공론조사의 결과가 법적인 효력이 없다고 해도 결국 도민의 뜻이 확인된 결과가 나오게 되면 정치적으로 이를 쉽게 무시할 수 없다”며 “정치적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게 기본적 판단이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제2공항이 강정마을 해군기지 갈등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도민들이 ‘자기 일’로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라며 “강정이 ‘평화’ 의제를 가지고 지역주민의 완강한 투쟁을 축으로 전국적, 세계적인 연대가 가능했지만 제2공항은 주민 내에서도 이해가 갈려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2공항 건설과 직결되는 과잉관광 등의 문제를 충분히 알리면 강정주민이 그랬듯 도민이 ‘자기 문제’로 인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며 “대규모 항쟁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국토부의 일방적 추진을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그 사업이 도민의 뜻이 아니라는 걸 가시화하는 방법뿐”이라고 피력했다. 

박찬식 제2공항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2공항의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10월7일 박찬식 제2공항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주시청 일대에서 열린 문화제 '필요어수다양' 무대에 올라 제2공항의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제2공항, 인프라 넘어선 비전과 연결된 문제”

박 상황실장은 제2공항 이슈가 단순히 하나의 거대한 인프라를 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제주 사회 전반에 연쇄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공항 하나가 더 생기면 더 많은 관광객 들어오고, 대규모 숙박시설이 생길 수밖에 없고, 도로도 더 놔야 하잖아요. 지금은 제주도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대규모 관광개발 위주로 계속 갈 것이냐, 아니면 멈춰야 하느냐를 결정하는 분기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가족끼리, 친구끼리, 이웃끼리 단순히 찬반을 떠나 티격태격하며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겁니다. ‘미래비전’은 큰돈 들여 만드는 게 아니라 술집에서 많이 얘기돼야 하는 겁니다. (웃음)”

#“올해 가장 큰 성과는 시민사회 결집”

박 상황실장은 올해 제2공항 반대 운동을 두고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하나로 결집한 것(비상도민회의) 즉, 도민의 의지를 모아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낸 점이 가장 큰 성과”라 꼽으며 “국토부의 기본계획 고시를 막아낸 점 역시 인상적인 결과였다”고 말했다. 

지난 30일 오후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주시 아라2동 주민자치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30일 오후 박찬식 제주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이 제주시 아라2동 주민자치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또 아쉬운 점으로는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도민의 여론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여론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시키는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측면에선 부족한 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간혹 제2공항에 반대하는 뜻은 같아도 방식이 다를 때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서로 상처받고 감정 상하는 상황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며 “차이 자체를 없애는 것은 어렵다. 다만 차이가 있는 채로 큰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제가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는 지난달 15일 제주도의회가 제2공항 건설 갈등 해소 특별위원회(위원장 박원철) 구성 결의안을 통과시킨 날을 꼽았다. 그는 “시민사회 차원의 투쟁과 공적인 대의기구가 나서는 건 큰 차이가 있다”며 “그 소식을 듣고 단식을 중단할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새해 계획을 묻자 “올해와 크게 달라질 게 없다”며 “제2공항이다. 다만 공론화가 성사된다면 지역 시민사회 내 제주의 비전을 모아나갈 수 있는 공동 연구·공론의 장을 열고 싶다”고 바랐다. 

그는 내년 1월1일 성산일출제가 열리는 행사장 인근에서 제2공항 반대 피켓 시위에 참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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