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作心三日), ‘결심이 사흘을 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가 그러하다.

마음을 다잡아 세운 계획이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거나 그만두는 현상을 말한다.

고려말기 국가정책이 일관성이 없어 수시로 바뀌고 삼일을 넘기지 못해 혼란스런 국가운영 상황을 비꼬는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말에서 유례 되었다고 전해진다.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은 조선 중기 문신이었다.

‘국가질서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조정을 신뢰하지 않는 혼란스런 시대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어리석은 왕을 설득하고 분노한 백성을 달래면서 쓰러져가는 조선의 국체를 위해 동분서주 했던 명재상’으로 역사가 기록하는 인물이다.

그가 군 최고사령관격인 도체찰사 직을 맡았을 때였다.

각 고을에 공문을 발송했는데 사흘 뒤 갑자기 공문 내용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역리(驛吏)를 불렀다. 그리고 사흘 전 발송했던 공문들을 모두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역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사흘 전 공문을 가져왔다.

“어찌된 일인가? 이미 사흘 전에 발송했어야 할 공문이 왜 네 수중에 있느냐?” 류성룡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노기 띤 얼굴이었다.

역리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고을에 발송했던 공문이 사흘 뒤 회수되고 다시 고쳐 발송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이번에도 사흘 뒤에 회수 될 것으로 예상하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현상이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에 류성룡이 부끄러워하며 공문을 고쳤다는 일화에서 ‘작심삼일’ 성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팩트에 근거한 것인지, 지어낸 픽션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전해지는 말로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이렇게 생산된 ‘작심삼일’이 사람들의 ‘계획 담론’과 연결되어 이야기되는 것은 아이러니칼 하다.

‘인간은 계획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계획으로 시작하고 노력으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고리키의 말도 계획이 인간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획을 세운다.

아침에는 하루의 계획, 월요일에는 일주일의 계획을 세우듯이, 일 년의 계획은 새해 첫날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계획은 염원과 꿈을 배양하는 ‘희망 상자’나 다름없다. 작지만 소담스런 소소한 꿈에서부터 운명을 가르는 크고 담대한 염원까지 담아 인생을 키우는 것이다.

계획은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일 년을, 더 나아가서 일생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는 자양분이고 인생을 보람되고 알차게 꾸미는 희망의 씨앗이다.

건강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고 있는 인류의 문제다. 그래서 무병장수(無病長壽)가 인류 필생의 꿈으로 작용한지는 그만큼 오래다.

새해 소망이나 삶의 계획에서 거의 예외 없이 건강이 화두(話頭)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새해에는 술을 끊어야지”, “담배를 끊어야지” 등을 굳게 작심하는 것도 건강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그래서 아끼던 고급술도 쏟아버리거나 남에게 줘버린다. 서랍의 담배나 재떨이는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기 일쑤다.

고급제품의 등산복과 등산장비는 물론 거액의 헬스클럽이나 휘트니스 회권 권 구매도 주저함이 없다.

몇 개의 외국어 학원 등록 등 자기계발을 위한 프로젝트나 프로그램 참여는 새해 계획의 단골메뉴다.

그렇다면 이처럼 호기롭게, 그리고 담대하게 시간과 돈과 폼과 열정을 투자하여 세운 신년 계획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가.

여기서 ‘작심삼일’의 말머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계획실천에 이상음이 생겼음이다. 실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신호인 것이다.

‘작심삼일‘에 대한 변병이나 이유는 제각각일 수가 있다. 금주․금연 계획은 설날까지 연기하거나 유예기간을 둔다는 이유를 내걸 수도 있다.

등산이나 운동, 어학원 등의 자기계발 프로그램에 대한 ‘작심삼일‘도

시간 타령으로 국면을 넘기려 할 것이다.

물론 꿋꿋하게 계획을 밀고 나가는 ‘의지의 한국인’들도 많을 것이다. 계획은 절박성과 의지에 따라 추진력과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작심삼일’을 부정적으로 재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흐지부지하는 계획 실천의 변명을 나무라려는 것도 아니다.

되레 ‘작심삼일’의 부정적 면을 걷어내고 긍정언어로 환치(換置)하고 싶은 것이다.

꼭 사흘이라는 시간과의 싸움만이 아니라, 심사숙고하며 어렵게 결정한 계획이 얼마 못가서 깨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 변명이 가능하다.

실천의지가 약하거나 실천하기가 어렵고 무거운 거창한 실천계획이 실천의지를 눌러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심삼일’을 ‘삼일도 못가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작심하고 삼일만 견디면 이뤄낼 수 있다’는 긍정적 신호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삼일이 실패하면 또 다른 삼일을 시작하여 도전 하고 이를 계속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신호인 것이다.

이는 반복되는 실패의 경험에서 참다운 미래를 견인하는 성공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킴스티븐슨 등 임상 심리학자들은 계획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쪼개기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

너무 큰 목표보다는 매일매일 작은 목표를 만들어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언인 것이다. ‘실천 가능한 목표’를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작은 계획이 성공한다면 다른 일들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긍정의 힘’으로 작용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응일반화’ 현상이다.

이런 논거에 근거해서 ‘작심삼일’의 ‘삼(3)’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선다.

수리학이나 신학, 철학, 영성학 등에 나타나는 ‘3’은 완성의 수이며 신비의 수로 이야기되고 있다.

‘3’은 신화나 역사 또는 현실세계에서 인간과 아주 밀착되어 있다. 모든 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의 수다.

동양철학에서는 우주를 이루는 3요가 '천지인(天地人)이다.

천주교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일체로 여겨 신성시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의 여신은 3명이다.

‘국민․영토․주권‘은 국가의 3요소다. ’노동․자본․토지‘는 생산의 3요소요, ’생산․분배․소비‘는 경제의 3요소다. 이들을 완성하는 밑바닥 수가 ‘3’인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가위․바위․보, 삼판양승, 해와 달과 별, 아침․점심․저녁, 야구의 삼진 아웃, 재판의 3심제, 삼국지에서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정반합을 이루는 헤겔의 변증법까지 우리의 삶과 철학과 역사 속에서 작동되는 ‘3’은 무궁무진 하고 신비롭다.

논리의 비약이거나 궤변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심삼일’에‘서의 ‘3’은 모든 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의 수’이며 ‘힘의 수’, ‘완성의 수‘라고 억지 부리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작심삼일’은 실패의 언어나 부정적 단어가 아니다. 긍정의 힘을 유발하는 가능성의 성어이자 완성의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새해 계획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반복과 도전과 긍정의 힘을 조화롭게 행사한다면 그렇다.

‘작심삼일’의 역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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