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저는 여러 강사님을 모시고 강연을 추진해 왔습니다만 오늘은 제가 그 강사가 되어 여러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는 펜네임으로 강연을 하고 싶었습니다만 모두가 나도 파란만장의 삶을 살아왔다면서 혼자 독점하면 안 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실과 유모어를 비빕밥처럼 살짝 섞은 강연 첫 마디에 청중들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모든 이벤트와 강연들이 도미노처럼 줄지어 중지되는가운데 2월 27일 타카라쓰카시(宝塚市)

국제문화센터홀에서 김예곤(金禮坤. 만 86) 회장의 강연회가 시호카이(此法會) 주최로 열렸다.

'시호카이'는 우리들의 마음의 공백을 불교사상이나 세계의 종교로 행하는 이승과 저승까지 자신을 갖고 살아가기 위한 공부회 모임으로서 128회째 강연이 회원이기도 한 김예곤 회장의 강연이었다.

요즘 몸이 불편하시다면서 저음의 허스키 목소리로 들려주는 86세까지의 인생살이에는 감동과 설득력이 있었다.

앉아서 강연을 하는 김예곤 회장 바로 곁에서 영상 사진과 준비한 모든 자료를 챙기면서, 탈선하는 강연 내용을 체크하여, 원위치로 돌리는 하시모토 카나(橋本 佳奈) 여성의 재치도 청중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훈훈한 모습이었다. 

"월조남지(越鳥南枝)라는 말이 있습니다. 철새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못 잊어서 머나먼 고국의 방향으로  뻗은 나무가지에 보금자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1920년대 초기 19세 때 일본으로 건너 온 김말수(金末壽) 저의 부친은 그후로 고국에 한번도 돌아가지 못한 채 88세 때 돌아가셨습니다."

"(요즘 한.일간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 온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왔습니다. 고향 부산에서 그런대로 부농이었던 가정이 일본 조선총독부의 농지개혁으로 몰수 당했기 때문에 살길이 막연했기 때문입니다." 

동해 쪽의 후쿠이현(福井縣)에 살았던 김말수 씨는 효고현(兵庫縣) 타카라쓰카 무코가와(武庫川) 주변에 정착하면서 무코가와 하천변을 개간한 입지전의 인물이었다. 큰 비만 오면 범람하는 하천 주변을 자갈 채취 후, 그곳을 정비하여 논밭으로 개간하여 불모지를 옥토로 바꿔놓았다.

일본의 패전 후, 일본 부흥과 함께 자갈 채취 사업은 더욱 확장하게 되어 하천 주변의 자갈만이 아니고 산을 파헤치고 새로운 채굴 장소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김말수 씨는 이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진출했다. 식민지 종주국에서의 차별 속에 그의 사업의 원동력은 그의 포용력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그에 대한 신뢰성이었다.

"해방이 되어서 가족 모두 귀국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는 우키시마마루(浮島丸) 귀국선이 마이쓰루(舞鶴) 항에 정박을 위해 기항 도중 원인 모를 폭발 침몰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귀국이 늦어지고 또 하나의 이유는 봄에 심은 벼의 가을걷이까지는 기다리자는 저의 모친 말을 듣고 늦어진 귀국 준비가 결국 단념하기 까지 이르렀습니다."

1945년 8월 24일 한국의 피징용자들을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가 조선인 약 7천명을 태우고 1945년 8월 22일 오전 10시 일본 북동부에 있는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서 부산으로 향하다가 24일 갑자기 교토부 마이쓰루 항에 가다가 폭발과 함께 침몰하였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격침 시켰다는 설과 미국이 부설한 기뢰에 의해 침몰했다는 설이 있는데, 고의적인 격침 사건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침몰한 파편들의 형태가 안에서 폭발했을 때 생기는 상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공식적인 발표는 당시 한국인 3,725먕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

귀국을 포기한 김말수 씨는 앞으로 귀국하는 동포 자녀들이 조선어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타카라스카를 중심으로 5군데에 조선어학교를 설립했다. 사업과 동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에도 헌신적이었던 부친을 따라 김예곤 회장은 새로 설립한 조선어 초급학교에서 사범학교, 조선대학교까지 일관해서 민족학교에서 배웠으며 학교마다 1회 졸업생이기도 했다.

조선대학을 졸업하여 교사로서 홋카이도에서 큐슈까지 일본열도를 누비면서 조선학교 개설을 위해 분주했던 젊음의 나날들은 김예곤 회장에게 있어서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계몽주의자였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후, 토쿄 조선대학에서 조선어과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모든 열정을 쏟고 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하던 형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형님의 죽음은 저의 인생을 제가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장례식만 치르고 다시 조선대학에서 가르치려는 김예곤 회장에게 형이 했던 일을 물려받아 같이 해야 한다는 부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사업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타카라쓰카시라면 일본만이 아니고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창단 백년을 넘는 여성가극단 '타카라쓰카가극단'이 있다. 중학교 졸업자 이상의 미혼 여학생을 대상으로, 생도를 모집하여 2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본격적인 가극단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일본의 저명인, 연예인들의 딸들이 대부분이고 재일동포 딸들도 있다.

환상의 연극 무대를 여성만으로서 남성 역까지 완벽하게 선보이는 가극단은 무대만이 아니고, 그 주변까지 이국 정서를 자아내게 한다.인구 약 22만 5천명의 타카라쓰카시 위키페디아(위키 백과)를 열어보면 '타카라쓰카 가극단'도 있지만,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우미야마광업(海山鑛業)'도 있다.

'우미야마광업'은 조선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김예곤 회장이 경영해 왔던 기업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은퇴했다고 말하지만, 김 회장이 기업가로서만이 아니고 사회활동가로서도 활동하는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조선대학 교수 때에는 월간지 '새로운 세대'에 <국어강좌>를 1961녀부터 2년간 연재. <조선어회화>를 1965년에 '조선청년사'에서 펴냈고, 2002년에는 '사람IN사'에서 <포켓트 한일사전> <포켓트 일한사전>을 펴냈다.

1986년에는 조선대학교 총동창회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1996년 '타카라쓰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회' 초대회장, 1998년 동회와 시 및 국제교류협회 3자 공최사업으로서 이문화 상호 이해추진, 2002년 동회와 '타카라쓰카시 외국인시민 간화회(懇話會) 좌장, 2014년 타카라쓰카시제 50주년 기념식전에서 '국제교류공로상' 수상 등이 있다.

채석장과 레미콘회사를 경영하면서 1995년 일어난 코베 대지진(한신아와지대진재) 때는 무너진 건물들의 시멘트 잔해들을 철근과 분리 시키고, 자갈이나 모래로 재활용 자원으로 대대적으로 사용케한 사업 수단은 연쇄적으로 유명한 일화로서 남았다.

코베시에 있는 코베제강의 사업소에다가 기계 설비를 하고 상기 작업을 하면서 자재들을 인근 도시 산다시로 수송하는데 엄청난 수송료가 걸렸다고 했다. 지진 바로 후여서 도로 사정이 아주 나쁜 상태여서 많은 어려움이 겹쳤다. 경영학상으로는 이익이 없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쓴 웃음 속에 들려주었지만 자신에 넘치는 쓴 웃음이어서 듣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월드컵 개최를 위해 대구에서도 경기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래의 경기장을 허물었을 때 생기는 시멘트 잔해들 처리가 큰 문제가 되었다. 이때에 코베 지진 때 생긴 막대한 시멘트 잔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대구에서 효고현과 코베시에 문의가 있었다. 

효고현은 물론 코배시까지 소개해 준 회사가 '우미야마광업'의 김예곤 회장이었다. 나중에 이러한 이야기를 김예곤 회장으로부터 듣고 필자는 단편소설 <타카라쓰카 우미야마>라는 소설을 썼다.

"저는 저의 어머니의 '비손(양손을 모아 비는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아팠을 때마다 비는 모습은 지금도 저에게 강하게 남은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약 10년 전에 고(故) 이호철 작가가 오사카에 와서 김예곤 회장, 필자와 저녁 식시를 하면서 이호철 작가가 이북 고향에 두고고 온 어머니를 그리면서 한 말이었다.

"아, 선생님 어머님도 그리하셨습니까? 저의 어머니도 누가 아프면 하얀 치마 저고리를 입고 하천가에서 조용히 빌었던 비손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70세 때 돌아가셨습니다." 서로가 같은 동 연대 속에 그리는 어머니 이야기에 필자의 가슴이 찡한 기억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어느 분이  쓴 글이 있습니다. 타카라쓰카시에는 '토착민'(쓰지노히도:土の人)'과 '떠돌이(가제노히도:風の人)'가 있다고 했습니다. 80평생을 산 저는 아직도 '가제노히도'일까요?"오후 한시 반부터 시작한 강연은 도중 10분 휴게를 넣고 4시 넘게 했지만 시간 관계상 아쉬움 속에 마쳤다.

홀에서 강연을 마치고 다른 방에서 잠깐 질문과 토론 시간이 있었다. 어느 중년 일본인 여성이 손을 들었다. "아까 강연 속에서 '쓰지노히도(토착민)' '가제노히도(떠돌이)'가 있는데 저는 어떤 사람일까요?라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나무 같은 사람(기노히도:木の人)'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가제)이 데리고 와서 타카라쓰카에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무 같은 사람" 필자는 명답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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