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6일부터 수녀들이 매일 바친다는 기도문을 읽었습니다.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때가 때인지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진정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코로나 19’ 감염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해 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소외된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을 내려 주시길 간구 합니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한 기도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계속 바쳐진다고 했습니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코로나 19’는 재앙입니다. 세계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아직 백신이 개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감염예방이나 차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작 손 씻기나 사람간 거리두기, 기침예절 정도가 감염예방을 위한 최선책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잘사는 선진국이든 그렇지 못한 후진국이든 대책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는 지난 1월20일 첫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이후 3월15일 현재까지 누적 확진자가 8162명이 되었습니다. 54일 만의 일입니다.

2월20일 첫 사망자가 나왔고 현재까지 75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코로나 19’사태는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이어지던 삶의 일상을 여지없이 깨버렸습니다. 엉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나라의 모든 부분이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영세업자, 소상공인, 약하고 가난한 소외계층은 물론 겁 없이 내로라하며 살던 사람들도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여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적 저력이고 끈기입니다.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국민적 지원이 쇄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민족성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보호시설에 입주한 소녀들은 “울지마요 대구”,“울지마요 대한민국” 등의 표어가 담긴 ‘코로나 극복을 위한 희망 포스터’를 제작하여 대국민 응원메시지로 보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지원 성금, 이웃사랑 지원 물품 등도 줄을 잇고 있다고 합니다.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의 의사, 간호사 등 의료인들이 너도나도 ‘코로나 19’와의 사투 현장에 달려 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혈액 수급난 해소에 동참하는 ‘생명 나눔 헌혈 릴레이’도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업과 민간단체, 자치단체, 시민사회단체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의 개인과 단체가 ‘코로나 19’ 극복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공직 생활을 했던 80대 후반의 어르신은 현금 5억 원을 경북지역 모금 계좌로 스스럼없이 내놓고도 알리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내 달라‘며 보내오는 기초생활 수급자들의 성금 행렬도 코끝을 찡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온정의 손길도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어느 자가 격리 자였던 사람은 격리당시 이웃들의 다양하고 푸짐한 먹거리와 격려 메시지를 현관문 고리에 걸어놓고 ‘벨튀(벨을 누르고 튀었다는 약어)’했었다는 사연을 알리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이웃의 따스함”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세균 폭탄이나 다름없는 ‘코로나 19’에 시달리는 대구경북 시도민의 의연하고 질서정연한 사태 적응도 눈물겹습니다.

이처럼 ‘코로나 19’ 극복에 크고 작은 미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물질과 마음으로 전하는 사랑과 배려는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런데 온 국민이 이렇게 한 마음 한 몸으로 ‘코로나 19’ 극복에 하나가 되고 있는데도 나라를 경영하는 집권세력의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시행착오가 국민의 마음을 화나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대책, 마스크 수급 등에서 보여준 대통령과 관련 장관들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언동에 대한 국민의 심사가 그렇습니다.

‘코로나 19’ 대책과 관련한 정부의 대응은 민간부분의 발끝도 못따라가는 수준이하라는 것입니다. 민간부분에 비해 너무 낙후 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전문가 그룹의 조언을 팽개치고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헐레벌떡 서두르는 정부의 대증요법(對症療法) 식 처방에 대한 비판인 것입니다.

국민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변명과 거짓으로 국면을 넘기려는 비겁하고 무도한 리더십에 대한 지적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은 국난에 처한 위급한 상황을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그리고 소상히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적 지혜와 노력을 호소 했습니다.

그래서 국민적 지지 속에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루스벨트의 말입니다.

루스벨트는 중요한 국가 정책에 있어 국민적 합의를 매우 중요시 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는 직접 나서서 의회와 국민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런 연후에 결정된 정책은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대공황 극복의 ‘뉴딜 정책’도 이렇게 밀어붙였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송구한 말이고 루스벨트와 비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위기관리 리더십과 대비되는 사례입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는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다면 분명 대단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일치단결된 국민의 마음과 열정을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지 않는다면 세계적 평가에서도 분명 후한 점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최선을 다하는 일 뿐입니다. 자화자찬이나 희망고문은 금물입니다. 평가는 일이 마무리 된 후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수녀들의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는 문대통령의 위기관리 리더십에 대한 주문이자 한국의 빛나는 미래를 염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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