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비상사태로 각국의 국제항공편이 거의 마비된 상태 속에서 국제고도(孤島)가 돼버린 고향 제주에서 보내온 '제주문학'은 다른 때와 달리 무척 반가웠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제주국제우편물이었다.

지금 제주는 황금연휴로 국내 관광객이 넘쳐흘러 인구 유입의 진퇴양난 속에 코로나19와 맞물려 최대 난국을 맞고 있다고 한다. 옛날, 무척 옛날인 유년시절에 불렀던 "쩔걱 쩔걱 엿 장사 골목길을 다니며, 우는 아이 달래네. 웃는 아이 울리네"라는 노래가 문득 떠올랐다. 비유의 대상이 부적절한 야유성이라고 나무랄지 몰라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당신의 지금 외출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불필요한 나들이를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일 2,3백명으로 불어나는 코로나19 확진자 위기 속에 외출금지자제라는 전국 비상사태선언 중인 일본은, 29일부터 시작된 황금연휴가 터부가 된 채 기약 없이 표류하고 있다. 한국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본의 아닌 자택 대기 속에 있던 필자는 회원이기도 한 계간지 '제주문학'(한국문인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 제주문인협회발행) 봄, 82호를 하루 만에 거의 완독에 가깝게 읽어버렸다. 그 속에서 시 4편을 소개한다.

소설을 쓰고 있는 필자로서는 소설이나 수필도 소개하고 싶지만 전문을 게재할 수 없는 상태 속에서 부분적인 발췌나 감상을 쓰더라도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설사 이해하드라도 그 작품을 읽지 못하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작품 전문 게재가 가능한 시를 가끔 소개하고 있다.

지난 해 '제주특별자치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한 강중훈 시인의 <몽당연필 낙서>이다.

몽당연필 낙서

 

손끝에도 잡히지 못할 만큼

심이 다한 연필을 깎다가

놓쳐버린 사연이 있었지

 

적어놓고 싶은 이름이 많은데

담고 싶은 이야기들도 많은데

 

어쩌다 잘못 스친 칼날에

상처 난 손가락 끝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뚝 뚝

써내려간 당신의 모습 사이로

심이 다한 몽당연필이 나를

낙서하는 줄도 모르고

 

구부러진 세월이 마디처럼

무디어진 솜씨로는

잘 쓰여지지 않은 이름들과

거둬들이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손끝으로라도 집어볼까

하던 때가 있었지

 

적어둬야 할 이름은 많은데

담아둬야 할 이야기들도 많은데

몽당연필처럼 짧은 인생살이 속에 새겨두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부러진 세월의 마디 속의 방황의 늪에서, 승화된 연민의 과거를 되새김질 하고 있다.

제주문학에 게재된 이 시의 각행 바꿈에, 첫연 1행에서는 '손끝에도 잡히지 못할 만큼 심이 다한 연필을 깎다가 놓/ 쳐버린 사연이 있었지/. 3연 1행에서도. '어쩌다 잘못 스친 칼날에 상처난 손가락으로 떨어지/ 는 핏방울처럼.../ 으로 다른 행에도 이렇게 실려 있어서 읽는 리듬이 맞지 않는 위화감이 있었다. 의도적이었는지 나열 실수였는지 모르지만 필자는 읽기 쉽게 게재했다.

다음은 지난 해 '제주문학상(제주문인협회)'을 수상한 이소영 아동문학가 동시 <왜 이럴까>이다.

왜 이럴까

 

두근두근두근

가슴 뛰는 소리 들릴까봐

빨개진 얼굴 들킬까봐

일기장 속 숨겨놓은

우리 반 그 아이.

 

가까이 오면

다가가고 싶은데

발길은 모른 채 돌아가고

부드럽게 말하고 싶지만

앞에만 서면

혀가 삐딱거린다.

 

일기장 속에선 내 맘대론 데

마음 따로

행동 따로

나도 모르는 내 마음

왜 이럴까?

그래도 일기를 쓰고 있어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일기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그 애절한 마음을 어디다 표현하고 독백을 어디에서 하소연 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많은 연륜이 지났을 때 아름다운 '첫사랑'으로 각인될런지 모른다.

가끔 필자는'시'와 '동시'의 구별을 제대로 못해서 헷갈릴 때가 있다. 시와 동시만이 아니고 '시'와 '시조'도 그럴 경우가 있다. 그 경계선이 솔직히 어디인지 모른다. <몽당연필>과 <왜 이럴까> 두 작품을 읽으면 일맥 상통하는 흐름이 있다. 어릴 적 일기장에 솔직한 마음을 쓰고 있던 둥시 <왜 이럴까>가 <몽당연필>처럼 짧은 연륜의 황혼 속에서는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애잔함이 있다. '동시'와 '시'의 차이를 가르쳐주는 것 같다.

다음은 김정수 시인의 <라면 같은 것>이다.

라면 같은 것

 

꼬이지 않는다면

라면이

영 아니다

 

아무리 삶아도

꼬일 대로

꼬인다

 

긴 주름

스프링처럼

당겼다가

튕긴다.

 

삶이다

삶 아니면

꼬일 수가 있는가

 

사랑도

그리움도

꼬여야 제 맛이다

 

펴려고

생 라면처럼

부수어도 되는가

 

삶아서 흐물흐물

빈정대지 마라라

 

누구나

배고픈 자

따뜻한 한끼려니

 

내 삶도

라면 같은 것

꼬일수록 맛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시련에서도 참고 견딘다. 그야말로 일편단심이다. 그 파란만장의 인생은 꼬일수록 맛있고 멋있다. 라면의 시는 우연히도 또 한편 있었다. 안상근 시인의 <라면>이다.

<라면>

 

그 꼬불꼬불 구부러진 성깔을

교화하러

화탕지옥으로 보냈다

 

4분 30초의 권장 시간이

지나도

그 성깔은 변하지 않았다

 

숨도 못 쉬게

쇠말뚝으로 누르고 뚜껑을 닫아도

제 몸이 부르틀지언정 버티어 낸다

 

값싸다고 우습게 보지마라

이 세상

이만한 놈이 또 어디 있으랴

 

마지막까지 국수가 아니기를 고집하며

제 모습 지키려는 면발

성깔의 컵라면, 자존의 봉지라면

이 시에서는 라면을 의인화 하고 있다. 그 꼬불 꼬불 비뚤어진 성격을 고치기 위해 화탕(火湯)에 넣어서 삶아도 고고한 그 성격은 고칠 수 없었다. 두 시 중 <라면 같은 것>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데 일어나는 인간 내면의 본질적 비유보다는 외형적 요소로서 표현하고 있으며, <라면>에서는 인간이 지향하는 본질적인 내면을 비유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다. 서로 내용은 다르지만 <라면 예찬> 속에 우리들의 삶을 곁들여 접속 시킨 신선함이 배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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