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바이러스는 세계 각국의 전염병 의료 관계 최일선에서 근무하는 담당자의 진료 상황은 물론 의료업무 시스템을 바꿔버린 미증유의 전염병이었다. 아직도 확고한 치료법 없이 오리무중 속에서 코로나는 확산되고 있다.

종래의 전염병이나 일반 병과는 달리 생사의 위험 선상에서 날로 번져가는 코로나바이러스 공포 속에 담당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의료진들의 희생적 고군분투의 감동적인 미담들은 각국에서 넘쳐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 초기 당시, 확진자가 중국 다음으로 대량 발생한 한국은 세계의 따가운 눈총의 대상국이었다. 대구의 감염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반도 이남 전역에 퍼져나갔다.

담당 의료진들의 엄청난 인력 부족 속에 간호사들은 '대구로!'라는 구호 속에 약 3,950명의 자원봉사자가 있었고, 약 9백명이 현지에 가서 봉사했다고 한다. 한국에는 약 21만명의 간호사가 있는데 그 중에 약 4천명의 자원봉사자의 비율은 약 2%였다. 이것을 '2%의 기적'이라는 기록 속에 간호사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한다.       

5월 12일은 <국제간호사의 날>이었다. 나이팅게일 탄생일을 기념하여 1965년 국제간호사협회(본부 제네바)가 제정했는데 올해가 탄생 2백주년을 맞이 했고, WHO(세계보건기구)는 올해를 '간호사의 해'로 정해서 더욱 의의가 깊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늦장 대응에 비판 소리가 높은 가운데 5월 13일 쇼부시(28) 스모 현역 선수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5월 13일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프로 스포츠 현역 선수로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첫 희생자였으며, 최연소자의 사망이라는 사실에 일본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에 대한 응급 조치의 허술함이었다.    

4월 4일 발열이 있어서 7일까지 보건소에 연락을 했으나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고 지역의 병원에 연락을 하고 의료기관을 알아봐도 아무런 대응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8일 날도 발열이 계속되어 구급차로 후송되었지만 곧 입원할 병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밤이 되어서야 대학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9일 날은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다른 대학병원에 전원해서 10일 PCR검사 결과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로 판명되었다. 19일 병증세가 더 심해서 집중치료실로 옮기고 치료를 받다가 5월 13일 오전 영시 반에 사망했는데 TV에서는 속보가 자막으로 나왔다. 

이렇게 코로나바이러스의 맹위와 공포심에 떨고 있는 가운데 5월 12일자 요미우리신문 석간 1면 광고란에 게재된 기사를 오늘(14일) 아침에야 읽은 필자에게 코로나바이러스와 다른 내용이었지만 훈훈한 감동을 주었다. 필자만이 아니고 이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국제간호협회가 제정한 '국제간호사의 날'과 또 달리 일본에서는 1990년에 당시 후생성이 같은 5월 12일을 '간호의 날''로 정했다. 그리고 그 날을 포함한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간호주간>으로 정하여 여러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1세기 고령사회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간호의 마음' '케어의 마음' '서로 돕는 마음'을 서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눠 갖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남녀노소 관계 없이 키우기 위하여 <시민, 유식자에 의한 제정을 바라는 모임>의 제안에 의해서 정한 것이다.

이 행사의 하나로 <공익사단법인 일본간호협회>가 '잊을 수 없는 간호 에피소드'의 작품을 모집하는데 올해가 10회째였다. 요미우리신문은 최우수상 2개 작품을 게재했는데 그 중의 한편 사이토 야스오미 씨의 <그 목소리는>라는 작품 전문을 소개한다.

<그 목소리>

"병원까지 멀어요.마지막 대화가 될런지 몰라요." "그런 일은 없어요. 도착할 수 있을거야."

작은 목소리로 다투는 남녀의 대화가 연말의 전철의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던 나의 귀에 들렸다. 귀를 귀울이면서 듣고 있지 않았지만 절박한 남녀의 대화의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부부라고 생각되는 두 사람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면서 계속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전화하는 것이 좋아요." "아니,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역에 도착해서 해도 괜찮다." 다른 승객들도 마음이 쓰이는지 두 사람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의식이 없어도 귀는 들리니까 전화를 하세요.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어요." "전철 속에서 전화할 수 없어요." 서로가 감정이 높아지면서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휴대전화 상대편 쪽에서 숨을 거두는 부친이 있어서 임종의 자리에 도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형편을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완화(緩和) 케어 병동에 근무하는 나에게 있어서 정관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병동에서는 가족들에게 환자에게 마지막 말을 후회하지 않도록 권하고 있었다. 망설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갈려고 할 때 "전화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두 사람의 정면에 앉았던 여성이 말을 걸었다. 가까운 곳에 있었던 승객도 지켜보면서 그렇다고 끄덕이고 있었다. 등을 밀어받은 것처럼 남성이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아버지 귓가에 휴대전화를 놓아주세요." 전철 속에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버지.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 주셔서 우리들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조금도 배고픔을 몰랐습니다. 걱정 안해도 좋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고맙습니다." 조용해진 전철 속에서 오열을 꾹 참는 남성.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몇번이나 승객들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목적지의 역에서 내렸다. 전철 안에는 연말의 들뜬 들썩임과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따뜻함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바로 그대로 <간호>를 하고 있었다.그리고 모두가 마음의 따뜻함을 같이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전해 졌을 것이라고."

위의 글이 전문이다. 전철 속에서도 예의라고 같이 탄 일행과도 큰 목소리 내지 못하고 귓속 말로 주고 받는 일본인의 일상적 풍경 속에서, 짧은 이야기지만 가슴 찡하게 파고드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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