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잃어버린 30년'은 재일동포들도 즐겨 부르는 애창곡의 하나이다. 남북 이산가족의 애달픈 그리움을 부른 노래라고 하는데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도 고국의 부모형제들은 이산가족과 다름없다. 부모형제만이 아니고 고국의 친구나 모든 아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그렇다.

서러움과 안타까움, 그리움들이 하나가 되어 가슴에 옹이처럼 박혀진 '잃어비린 30년'이었다. 이 그리움의 상징처럼 불리워오던 '잃어버린 30년'이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의 기자회견과 함께 애틋한 그리움에서의 '잃어버린 30년'은 '배신의 잃어버린 30년'으로 변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 부부의 이중적 파렴치 행각으로 장관직을 사퇴했을 당시, 외국에 사는 동포들이 즐겨 사용하던 '조국(祖國)'이라는 위대한 단어는, 조국(曺國)이라는 이름 때문에 갖은 수모를 당하고 필자에게 있어서는 금기어가 되고 말았다. 병적에 가까운 트라우마일런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아깝고 귀중한 언어 자산의 막대한 손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조국 씨 이야기라면 "6개월 간 가족과 지인들의 숨소리까지 탈탈 털린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생각난다."고 윤미향 전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의 넋두리가 있었다. 이용수 할머니 첫 기자회견 후,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자신에 대한 각종 의혹들이 불거지자 5월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심정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여유스럽게 "겁나지 않는다."고 강조까지  했다.

비유의 대상에도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예도 많이 있다. 윤미향 씨는 그 비유의 대상으로 당당하게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꼬집어냈는데 필자는 아여실색의 도가 지나쳐서 소름이 끼쳤고 허탈감에 빠졌다. 파렴치 가족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는 그가 비유의 대상이라니 이념이나 도덕성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낸 '나는 제2의 조국'이라고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5월 7일 첫 기자회견에서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이용수 할머니에 대해 일부의 곱지 않은 시각은 이 할머니에 대한 기억력 운운 속에 치매설까지 비약했다. 그러나 5월 25일 2차 기자회견에서 이 할머니가 원고는 커녕 메모지 한장 없이 실타래처럼 풀어나간 한 시간 가까운 회견은 92세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저의 집을 방문한 윤미향 씨가 잘못했다고 무작정 빌었는데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성 없는 잘못과, 윤미향 씨가 안아달라고 해서 안았더니 30년을 같이해 왔던 일들이 떠오르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더니 눈물이 나더라."의 솔직한 애증의 감정 표현은 듣는 사람들을 충분히 납득 시키고도 남을 발언이었다.  

"위안부라는 말도 그렇지만 '성노예'라는 새로운 단어까지 만들어서 싫다고 했지만 그게 더 알맞는 표현이라면서 사용했습니다. 제가 어째서 '성노예'란 말입니까?" 이 할머니의 하소연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뼈아픈 말이었다. 위안부라는 표현보다 '성노예'라는 직설적이고 과격적인 표현이 외국에 알리는데 알기 쉽다는 이유에서 나온 단어였다.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에 언제나 '죠센징'이라는 단어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 단어이다.

조총련 사람들에게 차별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죠센징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북한을 신봉하니까 당연히 죠센징이다. 사용하는 장소에 따라서 좀 불쾌하지만 별로라는 대답에 위화감을 느낀적이 있었다. 

위안부나 성노예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위안부나 성노예도 어느 의미에서는 헤이트 스피치처럼 노골적인 차별 언어이다. 시민단체와 사죄 요구 운동을 하는 당사자 할머니들은 이해하고 납득하면서 그 단어를 전면에 내세워 운동을 벌이고 있을런지 모르지만 절대 다수자의 당사자 할머니나 그 가족들에게는 가장 잊고 싶고 지우고 싶은 단어일 것이다.

그것을 위안부를 위한 운동이라면서 당사자의 그 아픔들을 외면하고 전면에 내세우고있다. 이 할머니의 내가 어째서 성노예란 말인가의 뼈있는 항변에 대해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 차원에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문둥병'이 '한센병'으로 '자살'을 '극단적 선택' 혹은 '자사(自死)'로 언어가 새롭게 변하고 있는데 '위안부'나 '성노예'라는 호칭에 대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속앓이를 우리는 안일한 마음으로 방치해 왔던 사실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할머니의 정정한 목소리와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발언들은 물론 더욱 놀란 것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연도와 이름들을 슬슬 외웠던 구구법처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92세라는 연륜의 몸과 마음에서 나오는 진솔한 내용들은 '잃어버린 30년'의 배신감을 적나라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일 청소년들이 진실을 배우고 참된 교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의 수요 집회는 그와는 정반대로 갈등만 키운다고 했다. 이것을 앞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며 또 다른 핵심적 요소로서 위안부를 위한 모금 운동의 모금액에 대한 의혹 제기였다.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던 윤미향 씨가 5월 29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 마디로 무미건조한 내용의 일색이었다. 그녀에게 집중된 의혹의 모금액에 대해 구체성의 결여된 부정적 답변이 전부였다. 더욱 불쾌한 것은 기자들의 질문에 엷은 미소까지 띄우며 답변하는 자세였다. 여러면의 많은 의혹 제기에 대해 자신은 결백하다는 자신감과 무시가 교차하는 위선적 미소로 보였기 때문이다. 미소가 나올 주제의 회견도 아닌데 그 미소에는 쓸쓸함이 진하게 베어있었다. 

견물생심일까. 중학교 때부터 목회자의 꿈을 키우고 일편단심 위안부 문제에 임해 왔다고 자부하던 그녀가 어떻게 위안부를 위한 모금 의혹의 중심 인물로 지목되어 스스로가 배신의 잃어버린 30년을 만들어 버렸을까. 치외법권의 위안부 왕국 속에 군림하면서 주객이 전도되고 위안부를 빙자한 우려먹은 행위의 의혹들은 참담할 따름이다.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보기만 해도 늠름하고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구나 하는 안심감이 넘쳐흐른다. 그 광장에서 얼마 안 떨이진 곳에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있다. 10대의 어린 소녀상의 가냘픔에 필자는 가슴이 아프고 찡했다.  

2017년 11월 21일 아침 새벽에 처음으로 필자는 소녀상을 대하고 쓰다듬었더니 너무 차거웠다. 그 전날은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위안부의 상징적 항의 운동으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웠다는 대의명분 속에 그 어린 소녀상은 추위에 떨어야 했고,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그 위엄에 추위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소녀상의 차거움은 날씨 탓만도 아니었다. 위안부 항의 운동의 부조리에 대한 서글픔의 차거움이기도 했다.처음 소녀상을 대했을 때 '솔로몬의 재판'이 떠올랐다. 위안부 소녀가 가엾다면 그 소녀상은 지금이라도 곧 따뜻한 안식처로 옮겨야 하고 앞으로 소녀상 세우기 운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위안부 바로 세우기 운동이라는 명분 속에 위안부 당사자 할머니들은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하는 진실을 이용수 할머니는 다시 일깨워주었다. "수요일 집회에 다시는 안 나간다"고 선언까지 했다.

치외법권적인 위안부 투쟁 속에 '울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어린 아기 울음과 같은 친일론에도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어떻게 윤미향 씨의 위안부 모금 불법 사용 의혹이 친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헌령 비헌령의 진부한 친일론 속에 사리사욕이 비빔밥처럼 범벅이 되어 난무하고 있다.  

어리석은 국민들이 던지는 돌들이 억울하고 슬프다면 윤미향 씨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예수상이 있는 십자가 앞에서 "주님. 저는 어리석은 민중들로부터 억울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만은 알고 계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배신의 30년'이라고 자신을 사탄으로 빠트린 이용수 할머니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구원의 손길을 갈구해야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자신에게 돌을 던져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국가에서 행해 지는 상투적인 자아비판이 아니다.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비판이다. '시작이 반이라면 끝도 반이다' 그래야 '잃어버린 30년' 아니, '배신의 30년'이 새롭게 부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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