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작가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구름에 싸여 있는 한라산 풍경(사진=김일영 작가)
구름에 싸여 있는 한라산 풍경(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에 살다 보면 시시때때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라산이 배경화면처럼 익숙해진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만만하게 느껴지는 풍경은 결코 아니다. 무심히 바라보는 이에게 문득 장엄한 풍광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한라산이요, 그 순간 마음속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바로 한라산이다. 

이런 한라산 정상을 수시로 밟아보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어지간한 것은 만만하게 생각하던 20대 청년 시절이었다. 친구하고 둘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라산 정상에 오르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결행 첫날, 도시락을 싸 들고 한라산 등반 입구인 어리목으로 갔다. 그런데 관리사무소 앞에 이르자 갑자기 몰려든 먹장구름에 사위가 컴컴해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한라산 관리사무소의 작은 유리문을 두드린 우리에게 관리직원은 출입 통제되었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유리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한라산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관리직원은 우리의 맹랑함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짧게 한마디 했다.

“처녀 귀신 안 되젠 허민(안되려면; 편집자) 그냥 가는 게 좋을 건디!” ‘처녀 귀신’이란 한 마디에 아직 꺼지지 않고 있던 가슴이 여지없이 바람 빠진 듯 쭈그러들면서 전의를 상실했고,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처녀 귀신’이란 말은 우리의 무모한 도전이 불러올 여러 위험을 그 즉시 상상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한라산 정상에 오른다는 거창한 계획의 결행 첫날이 아닌가.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한라산 자락 산길을 걸어서 시내까지 내려가기로 했다. 어느 시인이 표현처럼 ‘들도 없이 산이 되는 목 타는 비탈’ 길을 비 맞으며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배가 고프니까 나무 아래 선 채 적당히 빗물을 국물 삼아 도시락을 까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한라산은 평온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느닷없이 폭우나 폭설을 쏟아낼 정도로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곤 한다. 3월 무르익은 봄날, 느긋한 마음으로 한라산에 올랐다가 때아닌 폭설로 상고대 눈꽃을 선사 받기도 했지만, 때로 눈비를 퍼부으며 우리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라산이라는 존재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우리 조상들은 지금 우리보다 더 한라산과의 관계가 더 밀접했으리라. 그래서 누군가는, 제주 사람들에게 한라산은 사냥과 방목의 장소이면서 죽으면 묻히는 영적인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을 ‘하로영산(한라영산)’이라 부르며 신성시했다. ‘하로영산’은 신령이 있는 한라산이란 의미이다. 사람들은 한라산을 신 자체로 관념하였고, 그에 따른 신화를 전승했다. 

한라산, 혹은 한라산 자락에서 솟아난 신들과 그 후손들을 ‘하로산또’라고 부른다. ‘한라산’에 신을 의미하는 ‘~ 또(도)’를 붙인 것이다. 한라산신들은 때로 ‘비의 신’으로, 때로 ‘바람의 신’으로, 때로 ‘사냥신’으로서의 신격을 가진다. 평소 한라산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신의 권능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제주섬 한가운데 자리한 한라산. (사진=작가 김일영)
제주섬 한가운데 자리한 한라산. (사진=김일영 작가)

1만8천 신들의 고향 제주에서 한라산신인 하로산또들은 중요한 신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민속학자 문무병은 <제주도 본향당 신앙과 본풀이>(민속원 펴냄, 2008)에서 “필자가 조사한 250개의 신당 중 산신당(하로산또를 모시는)의 수는 61개로 전체의 24%를 차지하며 농경신계의 신당 수 다음으로 많다”고 하였다.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처럼, 제주의 마을에는 신을 모시는 신당이 두세 개는 기본으로 있고, 어떤 마을에는 여섯 곳이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신당에는 그곳에 좌정해 있는 신의 이야기, 즉 당본풀이(신의 일대기나 근본에 대한 풀이를 이르는 말;편집자)가 전해진다. 물론 세월의 흐름과 변화 속에 이야기가 소실되어 이름만 남아 있는 신당도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굿이 행해지고 있는 신당들은 거의 대부분 당신화를 보존하고 있다. 

강림차사 신화인 차사본풀이나 농경신 자청비 신화인 세경본풀이 등의 제주신화는 풍부한 서사를 자랑한다. 그에 비해 당신화는 내용이 짧고 서사도 갖추지 못한 게 많다. 하지만 그 짧은 서사는 그 당을 모시는 마을 공동체의 삶과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몇몇 신당은 기록되지 않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적지로서 지자체의 보호를 받고 있다. 

제주도의 한라산신 하로산또를 모시는 신당과 당본풀이는 제주 사람들의 삶의 시작과 역사를 알게 해 주는 부호와도 같다. 사냥을 하며 한라산을 누비던 사냥신들 뿐만 아니라 바람신으로 풍수신으로,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던 산신백관으로 변신을 거듭하던 산신들의 역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 신화를 들여다보면 제주의 하로산또들은 단지 무섭거나 혹은 영험하거나 용맹하지만은 않다. 때로 우리 서민들처럼 평범하고 변덕스럽고 볼썽사납기까지 하다. 외부세계에서 들어온 여신들에 밀려 쫓겨나기도 하고 조롱당하면서 꼴사나운 모습을 드러내는 신도 있다. 이러한 모습이 단지 엄숙하기만 한 신보다도 더 개성적으로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리라.

지난 4년간 제주 마을 곳곳에 남아있는 신당들을 찾아 다녔다. 20여 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돌아온 고향 제주에서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제주 신화를 공부하게 되었고, 신화연구소 사람들과 답사길에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제주의 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별공주 아기씨, 아기들의 피부를 곱게 해주는 용궁의 셋째 공주님, 나주 금성산에서 들어와 제주여인들의 순결을 지켜주는 뱀신 방울아기씨, 그리고 한라산에서 솟아난 산신 하로산또였다. 

이들 신 중에서 한라산에서 솟아난 한라산신 하로산또들이 이번 연재의 주인공이다. 하로산또들이 좌정해 있는 신당을 찾아보고, 그곳에 전하고 있는 신화를 정리하면서 앞서 살았던 선인들의 삶을 풀어내 보았다. 이미 신화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거나 흔적만 보일 경우에는 보잘 것 없는 흔적이라도 붙들고 암호를 풀어내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껏 상상해보기도 했다. 

사냥의 신, 비와 바람의 신, 도교의 신선을 닮은 산신백관, 그리고 바다 건너 강남천자국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다 돌아온 하로산또까지, 이들 한라산신들의 서사를 펼쳐 보이면서 나의 소회도 곁들여보았다. 자, 한라산으로, 산기슭 동네 어귀 골짜기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신의 이야기를 벗 삼아 길을 떠나 보자.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작가 여연. 

제주와 부산에서 30여 년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퇴직 후에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신화 연구로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다. 생애 첫 작품으로 2016년 <제주의 파랑새>(각 펴냄, 2016)를 출판하였고,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7년 출판산업진흥을 위해 실시한 ‘도깨비 책방’ 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연구소’의 신당 답사를 주도하면서, 답사 내용을 바탕으로 민속학자 문무병과 공저로 <신화와 함께하는 제주 당올레>(알렙 펴냄, 2017)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 연구모임을 1년간 진행하고 2018년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른 책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 펴냄, 2018)를 3권으로 출간하였고 서울과 부산,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제주신화 테마길을 여는 등 제주 신화 스토리텔링 연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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