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새의 어머니는 말이고 아버지는 당나귀다. 이종잡종(異種雜種)이다. 노새는 저희 암수끼리 새끼를 낳지 못하는 가엾은 일대(一代) 동물이다.

프랑스에서는 정관수술로 거세당해 생산능력이 없는 남자를 ‘노새 인생’이라 불렀다는 말도 있다.

왜 뜬금없는 ‘노새 이야기’인가. 야성(野性) 없는 야당의 무기력을 깨우치기 위해 불러온 것이다.

제1야당이라는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을 겨냥한 것이다.

통합당은 지난 4.15 총선에서 참패했다. 그냥 진 것이 아니었다. 몸을 추스를 수 없는 지경의 궤멸(潰滅)수준이었다,

야당의 유전자라 할 수 있는 야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통합당은 총선 전 ‘보수 대통합’이니, 뭐니 하며 요란을 떨었었다. 그리고 당을 버리고 떠났던 철새 떨거지들을 끌어 모았다.

그래서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의 짝짓기로 미래 없는 통합당을 만들었던 것이다. 생식능력이 없는 불임정당,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는 ‘노새 정당’이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통합당은 투지가 부족했다. 거친 광야에서 눈을 번득이며 먹잇감을 노리는 치열함을 찾을 수 없었다.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을 몰랐다.

우선 선거 당시 당 대표였던 황교안(경칭 약)은 사즉생(死卽生)의 각오가 없었다. 종로 출마는 저울질 하지 말고 선제적으로 돌진했어야 했다. 전투에서 앞장서는 지휘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보여줘야 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우유부단한 리더십은 그래서 총선 패배의 한 원인일 수도 있다.

그리고 통합당은 ‘말의 프레임 전쟁’에서 상대 당을 압도하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압도당했다. 선거에서 ‘말’은 실탄이나 다름없다.

혐오스런 여성비하 발언은 민주당 후보가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엉거주춤했다.

통합당 후보의 ‘세월호 천막 스캔들’ 발언은 팩트 였다. 사실에 근거 했다. 상대 쪽 후보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막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상대당의 막말 프레임에 업어치기 당했던 것이다. 낚시에 걸려 되레 공격을 받았다. 여기서 통합당은 우왕좌왕 안절부절 이었다. 선거 운동 최악의 덤터기가 되었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문제, 탈 원전 사태, 경제 폭망 등 집권여당의 총선 악재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여기에다 ‘코로나 19’ 사태까지 겹쳤다.

여당 입장에서는 ‘위기’ 국면이었고 야당으로서는 이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정부는 ‘코로나 위기’를 ‘코로나 극복’ 구도로 돌리는 데 잽쌌다. 놀라운 위기관리 변신이었다. 반전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에다 전 국민에게 재난기금 지원 등 사실상 금권선거를 획책했다. 어이없게도 이것이 먹혀들었다.

통합당은 재난 기금 꼬리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참패를 당한 것이다. ‘생식능력 없는 노새 정당’의 슬픈 총선 이야기다.

야당의 존재 이유는 집권여당에 대한 강력한 감시와 견제에 있다. 신랄한 비판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질타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수권정당의 훈련을 쌓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인적 구성에 관계없이 치열해야 한다. 흔들리지 않은 뚝심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광야의 늑대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갈며 공격 포인트를 향해 으르렁 거려야 한다.

야당의 무기는 ‘입’이다.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논평으로 여당을 꼼짝 못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 비치는 현재의 통합당은 지리멸렬(支離滅裂)이다. 입은 없고 눈치만 발달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이다.

오히려 입지 강화를 위해 집권여당과 ‘실리적 공생관계’ 모색에 나서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다.

야성은 간곳없고 ‘배지 놀음’을 즐기는 것 같은 일그러진 모습에 국민들은 열불이 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집권여당은 어떠한가. 기고만장(氣高萬丈)이다.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우쭐하여 뽐내는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은 대승을 거두었다. 여당과 친여 세력을 포함 190석을 확보했다. 놀라운 압승이었다.

이것이 정권과 여당에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의 날개를 달아 준 꼴이다. 보무도 당당하게 ‘선출된 독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탈북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북의 실상을 알려주는 정보제공 차원이다. 표현의 자유 범주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와 관련한 북 김여정의 기침 한 번에 통일부와 청와대 여당이 벌벌 떨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 여당이 한 통속이 되어 말도 안 되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대북 전단 살포를 주도한 단체를 핍박하며 옥죄고 있다.

소위 ‘김여정 하명법’이라 불러 마땅한 ‘전단 금지법’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 김여정 눈치 보기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관이다. 어디 이게 정상인가.

헌법과 민주적 질서를 외면하고 부정하는 대통령과 국민보다 대통령 심기 살피기에만 눈알을 굴리는 부끄럽고 민망한 민주당의 작태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위중한 시기다. 경제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정치·안보·교육·사회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19’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 상황이다.

특히 전대미문의 ‘4.15 부정선거 의혹’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다. ‘부정선거’, ‘선거조작’의 정황 증거는 쌓였고 차고 넘치고 있다.

법무법인 필로드 소속 김학민 변호사는 지난 6일, ‘제21대 총선 부정선거 백서’까지 내놨다.

총선이 끝나고 제기된 부정선거의혹 정황증거를 조목조목 적시 한 것이다.

의혹의 구체적 내용과 선관위의 해명, 그리고 전문가들의 재반박과 추가로 제기되는 의혹들을 망라했다.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내용들이었다.

국민주권이 도둑맞은 사건이고 민주주의가 사느냐 죽느냐의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문제다.

민주당의 선거를 총괄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민주연구원장이 선거결과가 나오자마자 “무섭고 두렵다“며 직을 그만두고 잠적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은 분연히 일어나 온몸을 던져 진실규명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통합당은 “차렷! 열중쉬어”자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거지다. 권력의 뒤에 숨어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옹졸하고 무책임하다. 야당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제1야당을 이끌어 가야 할 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 위원장의 행보도 어정쩡하기는 마찬가지다. ‘갈 짓 자 걸음’인 것이다.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인 자유도 말로만 하는 형식적 자유에 불과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보수정당의 대표가 보수의 가치인 ‘자유’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라면 심각한 일이다.

통합당이 보수를 지향하는 정당인지,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는 좌 클릭 탈보수의 길을 가려는 것인지 여간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등 보수진영 인사들이 김위원장을 향해 ‘진보의 아류’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당연한 반응이자 지적이다.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김위원장의 정체성에 대한 보수 진영 일각의 우려인 셈이다.

이러한 김위원장의 행보가 통합당의 정체성 확립과 야성 회복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거듭 강조하는 소리지만 보수의 가치는 ‘자유’에 있다. 그러나 통합당등 지금까지의 한국의 보수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권위주의’만 있었을 뿐이라는 지적이 있어왔다.

그러기에 통합당은 권위주의 외투를 벗어 던져야 한다. 국민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누구를 대변하고,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정부와 여당을 견제하는 대안 세력이 되어야 할지 고민하고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하는 것이다.

치열하게 싸우고 장렬하게 죽는 거칠고 독한 야당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1802~1885)는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 서문 다음에 짤막한 서시(序詩)를 썼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싸우는 것이다. 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기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가, 죽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의 야성회복을 위한 길잡이가 여기에 있다. 죽기를 마다않고 싸워 이기는 것이다.

‘웰빙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거친 황야의 들판에서 야성을 키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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