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작가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가장 원초적인 신당에서, 제주를 다시 바라보다 

내 주변에는 제주 신화를 공부하는 지인들이 많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든 책을 통해서든 나 역시 자연스럽게 제주 신화를 접할 수 있다. 제주 신화는 두이레 열나흘 동안 이어지는 제주 큰굿에서 심방에 의해 구술되는 열두 본풀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제주는 한때 ‘당 오백 절 오백’의 섬이었으니 마을마다 신을 모신 본향당이 있었고, 다양한 기능과 역할에 따라 당에 좌정한 신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게 전승되고 있다. 그래서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신당을 찾아 길을 나서곤 한다. 

가끔 짬이 나면 신화를 공부하는 벗들과 신당 기행을 하고 있다. 신당을 가는 길은 잘 정비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은밀한 숲속에 자리해 있어, 신당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안내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신당은 한라산과 오름으로 이어지는 산비탈에서, 들판을 지나 돌무더기 사이 나무들이 빽빽하게 밀집된 곶자왈 지대에서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답고 청정한 공간에서 제주의 가장 원초적인 신당을 만날 때면 경외감마저 느껴지곤 했다. 

산 혹은 바다, 마을 한가운데 좌정한 신들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제주의 신들은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과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조그마한 일에도 잘 삐치고, 싸움도 잘하며, 조금이라도 잘 한다고 부추기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어줄 것만 같은, 그야말로 올레길 언저리에서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내 이웃 같았다. 제주인들의 시선과 관점으로 풀어낸 신화 속에는 제주만이 갖는 독특한 정서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당의 울타리는 돌담으로 되어있고, 그 안에는 커다란 신목이 자리하며, 그 아래는 돌로 만들어 놓은 제단이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대부분 당의 울타리는 돌담으로 되어있고, 그 안에는 커다란 신목이 자리하며, 그 아래는 돌로 만들어 놓은 제단이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신당 기행 할 때마다 떠올리는 소중한 두 사람이 있다. 내 인생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어머니’와 ‘외할머니’다. 두 분 다 불교 신자이긴 했지만, 무언가에 심하게 놀라거나 잔병치레할 때마다 어린 나를 절이 아닌 다른 곳에 데리고 가셨다.

해가 뜨기 전 가장 고요한 새벽녘쯤 촛불과 향을 피워놓고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아 하염없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모습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보살’이라 불리는 사람이 내 등짝을 세차게 후려치거나 입에 잔뜩 물을 들이마시곤 내 머리 위로 시원하게 뿜어내는 의식 행위를 펼치곤 했다. 이른바 ‘푸닥거리’다. 

어릴 적부터 주변의 어른들은 시시때때로 ‘삼승할망(삼신할망)’을 찾았다. 아이들을 보살펴 주는 신이 ‘삼승할망’이라는 두터운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만 놀라는 일이 생기면 외할머니는 머리 정수리 위에 손을 가볍게 얹고는 ‘삼승할망’을 불러내어 “우리 설운 애기, 오마, 넋 들여줍서!” 주문 기도하며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어주었다. ‘삼승할망’ 덕으로 나는 미완성된 혼과 넋을 달래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하루는 남편에게 나의 어릴 적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질문을 했다. 

“왜 하필 이런 간절한 비념(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비는 작은 규모의 굿;편집자)과 의식 행위가 동이 트기 전 새벽녘에 이뤄졌을까?”

남편은 어릴 적 자신도 수차례 비슷한 ‘푸닥거리’와 ‘넋들임’을 한 경험이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동이 트기 전 ‘밤’의 시간은 잡귀를 포함한 모든 ‘신들의 시간’이고, 동이 트면 비로소 ‘인간의 시간’으로 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편의 어머니도 제물을 담은 구덕(대나무 바구니;편집자)을 등에 지고, 서둘러 새벽녘에 집을 나서 신당을 향하셨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남편은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가 생각난 듯 들려주었다. 한번은 친구 집에서 놀다 보니 늦게 귀가할 것 같다고 꾸중 들을 각오를 하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닌 꾸중은커녕 ‘절대 밤길 다니지 말고 친구 집에서 잤다가 동트면 오라’고 고맙게도 마음에 쏙 드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신들의 시간에 다니다가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 인간의 시간에 움직여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화북 윤동지영감당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륵불이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화북 윤동지영감당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륵불이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내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평생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았던 분들이다. 짐작하건대 누구에게도 소문내지 않고 자신의 막막한 이야기와 고민거리를 들어 줄 누군가 필요했다. 하소연하고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시간과 공간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잠든 어두컴컴한 시각에 아직 아무런 손길이 닿지 않는 신성한 공간에서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제주 신당은 다양한 형태로 만날 수 있는데 대부분 신당의 울타리는 돌담으로 되어있다. 그 안에는 커다란 신목(神木·주로 팽나무)이 자리하고, 그 아래는 돌로 만들어 놓은 제단이 있다. 또는 커다란 바위굴 안이나 암석 궤에 제단이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곳은 주로 산신들이 좌정한 곳이었다. 

내가 눈여겨본 것은 신의 신체인 자연석이었다. 몇 년 전 해외 여행차 영국에 갔을 때 공중에 걸린 돌이라는 ‘스톤헨지(Stonehenge)’를 본 적이 있다. 종교적 숭배장소로 추정되고 있는 거석기념물이었는데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농사를 짓게 되면서 곡물 수확을 기원하는 원초적인 신앙 의식이었다. 물론 육지부나 다른 나라에서도 종교의 숭배 대상이 되는 커다란 형태의 돌들이 있다.

그런데 제주의 바닷가 마을이나 한라산 자락에서 본 미륵돌은 크기와 형태에서 훨씬 작고 아담했다. 주로 바다 밑과 제주의 숲속에 있는 신기한 돌이었고, 사람의 형상이나 동물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미륵신앙은 천지개벽을 꿈꾸는 민중불교의 한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미륵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험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미륵은 민중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영험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민중이 바라는 미륵 세상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신화학자 문무병의 <미여지벵뒤에 서서>(알렙 펴냄, 2018)를 보면, “(제주의) 미륵은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희망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어둠에서 벗어나는 희망의 불씨로 미륵불을 마을 신당으로 모셔온다. 비록 새로운 세상과 시대의 변혁을 꿈꾸는 원대한 모습으로서의 미륵은 아니지만, 아이를 낳게 해주고, 부자가 되게 하고, 병을 고쳐주는 친근하고 가까운 조상과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닷가 마을의 당에 좌정한 미륵불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의미와 영험이 담겨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바닷가 마을의 당에 좌정한 미륵불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의미와 영험이 담겨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물에서 건져 올린 돌, 희망의 신앙으로  

제주의 미륵돌 중 대부분은 땅이 아닌 바다에서 올라왔다. 깊은 바다 속에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건져 올려진 먹돌이 결국 바닷가 마을에 좌정하여 미륵불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공상과학소설을 방불케 한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낚싯줄에 걸려 올라온 먹돌은 아무 쓸모가 없어 다시 바다로 버려진다. 그런데 어부의 꿈속에 현몽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린다. 그리고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면 미륵불이 되어 대대손손 잘 살게 함은 물론, 아이를 낳게 해준다거나 병과 고통을 다스려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렇게 해서 신비하고 기이한 돌은 어부가 살고 있는 마을의 신당에 미륵불로 좌정하게 된다. 신성이 깃든 돌이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신앙으로, 괴로움을 구제하려는 부처의 마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미륵인 돌부처는 어떤 사람들에는 ‘나에게 태운 조상’이라 여겨 조상신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녕과 건강을 비는 수호신으로 인연을 맺는다. 다시 말해 제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절실한 소망이나 꿈이 미륵으로 나타나 독자적인 민중적 신앙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신성이 깃들어 있는 미륵돌은 대부분 바닷가 마을 신당에 있는데 얼핏 평범하게 보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추스르게 하는 미륵불이다. 이러한 미륵불은 ‘김녕 서문하르방당’, ‘화북 윤동지영감당’, ‘신촌 일뤠낭거리 일뤠당’, ‘함덕리 서물당’ 에서 만날 수 있다.

어떤 미륵불은 절 뒷마당에 옮겨진 것도 있는데, 바로 동회천에 있는 ‘화천사 오석불’이 그 경우다. 숨 가쁘게 한라산 자락까지 올라가서 만난 미륵불도 있다. 그것은 이름하여 살아있는 전설, ‘마씨 미륵당’이다. 그리고 하가리 고내봉에서 만난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당’의 미륵바위는 거대한 산신의 형상으로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이 미륵불을 둘러싸고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의미와 영험들이 담겨 있다. 아들을 낳게 해주는 신으로, 마을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는 신으로, 피부병과 전염병을 낫게 해 주는 신으로, 때론 어부와 해녀를 보호하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는 풍요의 신으로 제주 민중의 삶 속에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사를 하면서 알게 된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신당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훼손도 있지만, 당을 찾는 단골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당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찾아가는 신당이 언제 어떤 사연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안쓰러운 마음에 아직도 마을의 신앙공동체가 남아 있는 당을 찾아 오늘도 길을 나선다. 

작가 홍죽희.

제주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2020년 2월에 명예퇴직했다. 대학 시절 마당극 운동 단체인 극단 수눌음‘ 회원으로 활동하며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독서모임 아랑ᄒᆞ라와 아코디언 모임 바숨의 회원으로 틈틈이 인문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을 키우는 중이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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