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삼성을 상대로 355일간 철탑 농성에서 승리한 김용희씨가 제주도청 앞 천막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25일 삼성을 상대로 355일간 철탑 농성에서 승리한 김용희씨가 제주도청 앞 천막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얼음처럼 굳고 굳은 착취와 억압과 무관심의 질서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어가는 노동자의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불꽃뿐.”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에서 발췌>

지난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 스물두 살의 청년이 휘발유를 뒤집어쓴 채 불타는 몸으로 뛰어다니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 스러져갔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2019년 6월 10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 60대 해고 노동자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바위’인 삼성을 상대로 복직과 사과를 요구하며 25m 높이의 철탑에 오른다. 

둘 모두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강요된’ 선택이었다.

#“삼성항공 입사 때부터 기업의 구조적 모순 느꼈다”

지난달 25일 세찬 비가 뜨거운 아스팔트를 식히던 날 제주도청 앞 천막에서 김용희(61)씨를 만났다. 고공 농성 당시 연대해준 강정마을 활동가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사흘 간 제주를 방문한 차였다. 인터뷰 내내 그는 크게 기뻐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으며 담담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의 얼굴에선 오랜 싸움에 지친 듯 하다가도 마치 쏟아내리던 비처럼 멈추지 않을 에너지가 느껴졌다. 김씨가 철탑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기간은 355일이지만 삼성을 상대로 힘겹게 맞선 기간은 20년이 훌쩍 넘었다. 

지난달 25일 삼성을 상대로 355일간 철탑 농성에서 승리한 김용희씨가 제주도청 앞 천막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25일 삼성을 상대로 355일간 철탑 농성에서 승리한 김용희씨가 제주도청 앞 천막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1982년 삼성항공에 입사하면서부터 삼성이라는 기업이 가진 여러 구조적 모순을 느꼈다. 다른 동료 직원들과 달리 김씨는 이런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노예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을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3일 만에 마산 삼성병원에서 깨어났어요. 그때 눈을 뜨면서 나 자신과 약속했던 게 ‘더 이상 도피하지 않겠다’ 결심했죠. 대신 삼성의 잘못된 시스템을 타파해 나가야겠다고…. 두 번째로 태어난 것이니 죽었다 생각하고 싸우겠다고요.”

그 후로 김씨는 몸을 사리지 않는 투쟁을, 삼성은 그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는 1990년 삼성그룹 경남지역 노동조합 설립 준비위원장을 맡고 나서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감금돼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노조 설립 포기시키려 성추행과 간첩 혐의를 씌우기도

1991년 3월 삼성 측은 눈엣가시였던 김씨에게 여직원 성추행 혐의를 덮어씌워 해고했다. 다행히 그 여직원이 양심선언을 통해 “성추행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줬고 김씨는 삼성을 상대로 해고무효 확인 소송을 진행했다. 

당시 김씨에겐 공증까지 받은 여직원의 확인서가 있었기 때문에 재판에서의 승소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1심 때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다니느라 재판에 신경을 쓰지 못해 패소했고 2심 땐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를 맡았으나 판결을 뒤집을 공증서를 제출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출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승소가 확실했던 항소심에서도 패소하자 문재인 변호사의 사무장이 “공증서를 빠뜨리는 실수를 했다”며 사과하기도 했다. 이를 알게 된 대법원이 무료로 상고를 진행해주겠다고 했고 결심이 있기 10일 전 사측에서 연락이 왔다. 복직을 시켜줄 테니 상고를 취하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측에선 “상고심에서 당신이 승소할 거란 보장이 없다”며 협박을 했고 김씨는 자신을 해고한 당시 인사본부장을 해고하는 조건으로 상고를 포기했다. 그는 해고된 지 3년여 만에 복직했으나 러시아 지사로 발령받았다. 1년을 근무하고 귀국하는 조건이었다. 

지난달 김용희씨가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을 찾아 문국현 신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독자 김미경씨 제공)
지난달 24일 김용희씨(왼쪽)가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을 찾아 문정현 신부(오른쪽)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독자 김미경씨 제공)

 

러시아에서도 노조 설립을 포기하라는 강요가 계속됐고 김씨가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년이 지나자 사측은 김씨를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로 다시 발령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않자 그를 사상범으로 몰기 시작했다. 

“제 방에 노동 운동 관련된 서적이 몇 권 있었는데 회사에서 이걸 물고 늘어졌어요. 아파트 공사 현장 같은 데서 9시간 동안 제 팔다리를 묶어놓고 노조 포기 각서에 서명하라고 했는데 제가 끝까지 하지 않으니까 ‘이 새끼 안 되겠네’ 이러면서 간첩으로 몰아세웠어요. 대사관에서도 조사하러 왔었는데 별거 없으니까 경찰을 부르지도 못하더라고요.”

사측이 또다시 근거 없는 혐의를 들이대며 탄압하자 김씨는 이에 맞서 약 10일간 단식을 했다. 그러자 삼성건설 임원이 직접 찾아와 단식 중단을 조건으로 김씨를 한국으로 발령하기로 약속했다. 

1995년 5월 30일 우여곡절 끝에 1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지만 정상적으로 출근할 수 없었다.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람’이라며 입구에서부터 경비들이 그를 막아 세웠다. 결국 삼성은 그를 대기발령 조치했고 3년 뒤 삼성기계로의 복직을 약속했지만 회사가 사라지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이 넘도록 막막하고 외로운 투쟁이 시작했다. 

#“지상에선 방법 없어 죽을 각오로 올라갔다“

2019년 6월 초 김씨는 8층 건물 높이보다 높은 철탑 위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지난한 싸움을 끝내겠다며 집을 나온 그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다. 여러 차례 단식 농성을 해도 삼성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해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성은 물론, 언론과 한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고립된 투쟁은 그를 막다른 길로 몰아갔다.  

“지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봤는데 안 됐잖아요. 적어도 철탑 위에 올라가면 삼성이 광고비로 언론을 막는다 하더라도 시민과 다수 국민들에겐 보이겠지 했죠.”

지난 4월 20일자 미국 뉴욕타임즈 국제면에 김용희씨 고공 농성 사진과 인터뷰가 실렸다. (사진=미국 뉴욕타임즈 갈무리)
지난 4월 20일자 미국 뉴욕타임즈 국제면에 실린 김용희씨 고공 농성 사진과 인터뷰 기사. (사진=미국 뉴욕타임즈 갈무리)

많은 이들이 말렸다. 함께 싸우던 동지들도 “올라갔다가 포기하고 내려는 순간 우리들의 투쟁도 끝”이라며 고공 농성에 반대했다. 김씨는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죽어서 내려오겠다”며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달 10일 김씨는 삼성을 상대로 진정한 사과와 명예복직, 그리고 해고 기간에 대한 보상 등 세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고 올라갔다. 

“어차피 해고자의 삶이란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가정도 해체 수준까지 갔고…. 절망 속에서 오랜 기간 외롭게 싸우다 보니 오히려 차라리 죽어서 모든 것을 다 잊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정말 살려는 생각이 있었으면 못 올라갔겠죠.”

#“반 년동안 철탑 농성 방치한 삼성…수십 번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는 보름 안에 삼성에서 대화를 시도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반 년 가까이 지나도록 삼성은 그를 방치했다. 특히 정년 퇴임일인 같은 해 7월 10일을 넘기자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냥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쭈그려 지내야 했던 355일.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와 철탑이 휘청이던 가을 태풍, 한겨울의 한파를 고스란히 견뎠다. 그보다 그를 더욱 괴롭힌 건 공황장애였다. 지름 120cm 정도의 공간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게 붙든 것은 바로 아래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동지들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이었다. 

철탑에 오른 지 180여일 만에 삼성 측에서 1차 협상안이 나왔다. 하지만 처음에 내세웠던 요구 사항과 간극이 커서 김씨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지난 3월부터 임미리 고려대학교 교수(김용희 삼성해고노동자 고공농성 공동대책위원회 대표)가 협상 테이블에 합류했다. 4월엔 미국 뉴욕타임즈 국제면 머릿기사에 김씨의 고공농성 사진과 인터뷰 내용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5월 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문제와 함께 노조 와해 시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일각에선 이를 김씨의 고공 농성이 가져온 성과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달 29일 삼성이 김씨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지난 5월 29일 355일 만에 땅을 밟은 김용희씨와 함께 승리를 기뻐하는 심상정 의원. (사진=심상정 페이스북 계정)
지난 5월 29일 355일 만에 땅을 밟은 김용희씨(오른쪽)와 함께 승리를 기뻐하는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왼쪽). (사진=심상정 의원 페이스북 계정)

#죽지 않고 살아남아 땅을 밟다

김씨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355일 만에 땅을 밟았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거대 자본과의 싸움에서 노동자가 명백하게 승리를 얻어낸 순간이었다. 

“그동안 삼성에서 노조를 건설하려다가 떠난 동지가 참 많아요. 그들이 떠나면서 했던 얘기가 ‘나를 대신해서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였어요. 그때마다 ‘나 김용희는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얘기했고요. 그 약속을 지킨 게 가장 기쁩니다.”

김씨는 이번 승리가 자본에 맞서고 있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끝까지 투쟁하면 반드시 쟁취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많은 분들이 패배주의적인 투쟁을 했지만 이제 현장에서 제 투쟁의 성과에 대해 많이 논의되리라 기대한다”고 바랐다. 

이어 “삼성이라는 자본과 싸우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며 “조직 없이 싸우는 동지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동지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지난달 25일 삼성을 상대로 355일간 철탑 농성에서 승리한 김용희씨가 제주도청 앞 천막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25일 삼성을 상대로 355일간 철탑 농성에서 승리한 김용희씨가 제주도청 앞 천막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독자 김미경씨 제귱)

소위 ‘삼성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에서 법 위에 군림하는 대기업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3권을 침해하며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를 갖가지 방법으로 탄압하고 해고했다. 이 부당함에 맞서 싸운 김용희씨의 편에 선 이들은 많지 않았다. 언론도, 정부도, 정치인도 묵인하고 눈감았다. 

50년 전 한 20대 청년은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열악한 노동 환경을 방치하는 기업과 정부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통받는 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깨기 위해 분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절박함과 외로움은 김씨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씨가 철탑 위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죽을 만큼 외로웠던 순간마다 전태일 평전을 꺼내 읽고 철탑에서 내려오자마자 전태일 열사 묘소를 가장 먼저 찾은 이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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