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제주는 ‘바람 많고, 여자 많고, 돌이 많은’ 삼다(三多)의 섬이다. 무심히 ‘삼다’를 얘기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고단했던 제주의 삶과 연관이 있다. 이 중에서 제주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각자의 만남이 다 다르겠지만, 나는 고향 제주로 돌아올 때마다 비릿하면서도 신선한 갯내음을 풍기며 달려드는 ‘바람’에 반가움이 왈칵 솟곤 했다. 때로 마음의 준비도 되기 전에 느닷없이 불어 닥쳐 오소소 떨게 하는 제주의 바람, 이 바람 이야기로 한라산신 하로산또를 만나는 여정을 시작해 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한라산과 마을 풍경. (사진=김일영 작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한라산과 마을 풍경. (사진=김일영 작가)

겨울에 제주의 강풍을 만났던 사람은 제주의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실감하게 된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살갗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한다. 물론 지구온난화에 그 기세는 예전만 못하지만 가끔 자신의 존재를 깨우치듯 휘몰아치는 게 제주의 바람이다. 

바람이 거세니 농작물은 제대로 줄기를 올리지 못하고, 어지간한 열매는 강풍에 여지없이 떨어져 내린다. 지금처럼 단열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제주 사람들은 집들을 납작하게 엎드린 듯 지은 후에 밧줄로 지붕을 꽁꽁 얽어매야 했다. 특히 바닷바람을 바로 받는 해안가 사람들은 돌로 쌓은 울타리를 바짝 올리며 바람을 피했다. 

이웃끼리 돌담과 돌담이 어깨를 맞대고, 돌담과 돌담 사이가 골목길이 되면서 구불구불 이어져 서로 바람막이가 되도록 했다. 그래서 바닷가 마을에는 돌담 사이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이 골목에 잘못 차를 운전하고 들어갔다가 수렁에 빠진 것처럼 빠져나오는 데 진땀을 흘려야 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내 동생은 한때 중산간 지역에서 대규모로 콩 농사를 지었는데, 한 해는 태풍에 작살나고, 한 해는 폭우에 절단이 나고 하면서 한 번도 농사에 성공하지 못해 형제들을 덩달아 노심초사하게 했다. 바람의 섬 제주에서 농사짓는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 여담이지만 그 동생은 요즘 풍력 전기 생산으로 사업 방향을 바꿔서 다행히 바람 덕에 먹고 살고 있다. 

제주의 바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기상학적으로야 이런저런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한라산신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무지막지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한라산신이 노여워한다고 생각해서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바람과 폭우로 노여움을 폭발시키는 대표적인 신이 바로 광양당신이다. 소천국의 넷째 아들(몇 번째 아들인가 하는 것은 구술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이기도 하다.

제주사람들은 한라산신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사람들은 한라산신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사진=김일영 작가)

광양당신이 분노하여 광풍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차귀도의 매바위 전설이다. 고려 때 송나라 황제는 제주가 천자가 날 땅이라는 걸 알고 고종달을 시켜서 산혈과 물혈을 끊어버리게 했다. 섬 전체에 단혈(斷穴) 행각을 벌이고 돌아가던 고종달이 차귀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치면서 배가 뒤집혔고, 고종달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제주의 단혈을 마친 고종달이 유유히 돌아가기 위해 차귀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라산 신령인 광양당신이 매로 변해 그의 배 위로 날아드니 갑자기 폭풍이 일어났고, 고종달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매바위가 있는 섬은 고종달이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뜻의 차귀(遮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한진오, <모든 것의 처음, 신화>, 한그루 펴냄) 

광양당신은 한라산 산신이며 비와 바람의 신이다. 신의 계보로 보면 송당계 신에 해당한다. 백주또와 소천국의 넷째 아들로 제주시 광양 지역에 좌정하여 제주 성안 사람들의 섬김을 받았다. 탐라국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광양당제’가 그것이다. 

제주도 주변 여러 섬 중에서 특히 풍광이 뻬어난 차귀도.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도 주변 여러 섬 중에서 특히 풍광이 뻬어난 차귀도. (사진=김일영 작가)

하지만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가 유교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신당 129개소를 소각해버릴 때 광양당이 파괴되어 사라졌고, 이 때문인지 광양당신에 대한 신화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진성기의 <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민속원 펴냄)에 광양당 본풀이가 몇 개 채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서사를 갖춘 본풀이가 하나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다. 송당본풀이나 궤네깃당본풀이와 내용이 겹치기도 했지만 나름의 독특한 내용도 없지 않았다. 

광양당신은 송당 백주또와 소천국의 넷째 아들이다. 아들이 어려서 장난이 심하고 버릇이 없어 부모를 노엽게 하였다. 그래서 부모가 이 아들을 말 잔등에 묶고 난 후 말허리를 걷어차 쫓아내 버렸다. 놀란 말이 겅중겅중 뛰더니 한라산 상상봉 봉오리로 뛰어올랐다. 상상봉에 오르는 동안 어찌나 말이 날뛰었는지 넷째 아들은 이리 긁히고 저리 긁히고 말이 아니었다. 

화가 난 넷째 아들은 채찍으로 말허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말이 더욱 놀라서 이번엔 바다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달리는데, 제주 앞바다 관탈섬에 뛰어내릴 때 넷째 아들을 그만 바닷물 속으로 풍덩 떨어뜨려 버렸다.

그때 용왕이 언뜻 잠이 들어 청룡황룡이 용궁 위로 얽어지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용왕은 큰딸을 불러 아무래도 이상하니 밖에 나가보라고 하였다. 나갔다 들어온 큰딸은 하늘에 별만 송송하니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둘째 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밖에 나가본 셋째 딸은 ‘산호수 상가지에 어떤 도령이 걸려 있었다’고 했다.

이에 용왕은 큰딸에게 도령을 내려오게 하라고 시켰다. 그래서 큰딸이 나가 도령을 내리려고 해도 내릴 수가 없었다. 둘째 딸도 마찬가지여서 마지막으로 셋째 딸을 내보냈다. 셋째 딸이 용궁 밖 산호수 아래로 나갔는데 상가지에 걸려 있던 도령이 절로 앞에 내려섰다.

용왕은 도령에게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이에 도령이 대답하기를, 자신은 제주땅에 살고 있는데 외나라에 난이 일어났다 하여 이를 막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용왕은 꿈에 본 청룡과 황룡을 생각하며 아무래도 도령이 예사롭지 않다고 여기고는 막내딸의 사위로 삼았다. 

도령이 용궁에서 사위 대접을 받으며 사는데 하는 일 없이 얻어먹기만 하니 머리가 벗어지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용궁에 이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온 넷째 아들은 서천서역국 절당에서 연 삼 년 공부하고 다시 제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로 갔다. 

소천국은 아들에게 ‘너는 큰 데 가서 공부를 잘하고 돌아왔으니 전국을 차지하라’고 하였다. 넷째 아들은 광양당을 차지하고 제주 성안 사람들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광양당은 센 당이어서 제주목사가 부임을 하여도 먼저 가서 신고를 하고 제를 올려야 했다. 사람들이 정성을 제대로 올리지 않으면 광양당신은 분노하여 비와 바람을 일으켰다. 

(다음에 계속)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작가 여연. 

제주와 부산에서 30여 년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퇴직 후에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신화 연구로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다. 생애 첫 작품으로 2016년 <제주의 파랑새>(각 펴냄, 2016)를 출판하였고,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7년 출판산업진흥을 위해 실시한 ‘도깨비 책방’ 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연구소’의 신당 답사를 주도하면서, 답사 내용을 바탕으로 민속학자 문무병과 공저로 <신화와 함께하는 제주 당올레>(알렙 펴냄, 2017)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 연구모임을 1년간 진행하고 2018년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른 책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 펴냄, 2018)를 3권으로 출간하였고 서울과 부산,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제주신화 테마길을 여는 등 제주 신화 스토리텔링 연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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