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김종민 전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은 국가인권위원회 제주출장소 교육관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바로읽기’ 다섯 번째 강연 ‘무장봉기와 5·10선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8일 김종민 전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은 국가인권위원회 제주출장소 교육관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바로읽기’ 다섯 번째 강연 ‘무장봉기와 5·10선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사 교과서엔 제주4·3 사건을 두고 소련 또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제주도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라 쓰여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소련과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흔적이 없는 거예요.”

지난 18일 김종민 전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은 국가인권위원회 제주출장소 교육관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바로읽기’ 다섯 번째 강연 ‘무장봉기와 5·10선거’를 진행했다. 

올해부터 사용하는 한국사 교과서(8종)엔 제주 4·3사건을 ‘폭동’이 아닌 탄압에 대한 저항 또는 미군 철수 주장 등 해방 이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 전개된 시기에 일어난 민족사적 사건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올해부터 사용하는 한국사 교과서 8종엔 제주 4·3사건을 ‘폭동’이 아닌 탄압에 대한 저항 또는 미군 철수 주장 등 해방 이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 전개된 시기에 일어난 민족사적 사건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사진은 위부터 금성출판사, 비상, 동아출판 내 관련 부분.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올해부터 사용하는 한국사 교과서 8종엔 제주 4·3사건을 ‘폭동’이 아닌 탄압에 대한 저항 또는 미군 철수 주장 등 해방 이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 전개된 시기에 일어난 민족사적 사건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사진은 위부터 금성출판사, 비상, 동아출판 내 관련 부분.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중앙당 지령설’ 첫 언급 장본인 “내가 쓴 것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일부 극우 단체나 극우 인사들은 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자료는 남로당 지하당 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씨의 글이다. 박씨는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비서 출신으로 월북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박씨가 지난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 기고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 지령에 의해 4·3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있다. 박씨가 기고한 글은 1983년 책 <박헌영>으로 묶여 나왔다. 이 내용은 보수 필진들에 의해 인용, 재생산되기 시작했다. 

김 전문위원은 지난 1990년 ‘제민일보’에서 4·3특별취재반으로 활동하며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살고 있는 박갑동씨를 직접 만났다.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사실 여부를 묻자 박씨는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하고 책으로 낼 때 중앙정보부에서 고쳐 쓴 것”이라고 해명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이다. 

우리공화당 제주도당 일간지 광고. (사진=독자 제공)
우리공화당 제주도당 일간지 광고. (사진=독자 제공)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총책이란 사람이 한 얘기니까 진실처럼 굳어져서 극우세력들이 이걸 계속 인용했죠. 이게 4·3이 된 거예요. 박씨의 해명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기사로 내니까 극우세력들이 난리가 났어요. 자기네들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박씨한테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박씨의 글이 유일한 원천이었으니까요.”

박씨는 “4·3은 서북청년단(이하 서청)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전문가 “남로당 전면 투쟁? 시기적으로 타당치 않아”

남로당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이들은 한목소리로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시기는 남로당이 전면적으로 투쟁하는 시기가 아니었다”며 ‘중앙당 지령설’은 시기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남로당 중앙당 입장에서도 4·3은 매우 곤혹스러운 사건이었어요. 조직이 완전히 풍비박산 날 수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중앙당이 무장봉기를 하라고 지령을 내릴 일이 만무한 거죠. 수많은 사람이 구금되고 고문치사(지나친 고문으로 죽게 함) 당하니까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이하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경찰들의 만행을 밝혀서 더 이상의 탄압을 막자는 목적으로 독자적으로 행동한 겁니다. ”

2011년 4월 1일자 제민일보 기사. 박갑동씨가 중앙일보에 연재 기고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 ‘4·3무장봉기가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이라는 주장은 자신이 쓴 게 아니라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쳐 쓴 것이라 고백했다. (사진=제주4·3아카이브)
2011년 4월 1일자 제민일보 기사. 박갑동씨가 중앙일보에 연재 기고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 ‘4·3무장봉기가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이라는 주장은 자신이 쓴 게 아니라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쳐 쓴 것이라 고백했다. (사진=제주4·3아카이브)

<남로당 연구>를 쓴 김남식 역사비평가는 지난 2003년 전화 인터뷰에서 “남로당의 5·10선거 저지 투쟁은 대중 동원에 의한 정치 투쟁과 폭력 투쟁을 배합한 복합 형태이며 전면 무력투쟁이 아니다. 제주 봉기 이후 본토에서 호응 투쟁도 없었다. 제주도의 특수 여건이 김달삼 등의 선동에 의해 터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 메릴(John Merrill) 전 미국 국무부 동북아실장은 그의 논문에서 “4월 3일의 공격은 남한 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캠페인으로부터 발생했지만 제주도당의 전투적인 지도부의 주도 아래 감행됐다”라고 분석했고 지난 1990년 ‘제민일보’와 인터뷰에서도 “나의 결론은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4·3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대의 분석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 “물리·정치적 상황 따지면 제주도당 자의로 봉기 결정”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이었던 이삼룡씨는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1947년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씨는 ‘4·3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에서 “4·3 투쟁은 미숙하면서 모험적인 분자들이 시기 아닌 시기에 세밀한 준비도 없이 단지 몇 자루의 소총을 가지고 저돌맹진(앞뒤 안 보고 돌진함)한 것이기 때문에 전국적 투쟁의 일환으로부터 자의로 이탈해 개시된 것”이라고 밝혔다. 

‘남로당 연구‘ 책 표지.
‘남로당 연구‘ 책 표지.

이뿐만 아니라 군 장성 출신들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1사단 12연대장을 지낸 김점곤 예비역 육군 소장은 그의 저서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에서 육·해·공으로 격리된 제주도로부터 적화를 확대해 북상을 시도한다는 것은 물리적 능력과 정치적 상황에 비춰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폭거라는 점 등 6가지 이유를 내세워 중앙 지령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5·10 선거 반대 투쟁에서 제주도만이 특이하게 이질적인 투쟁 형태를 보였고 이는 당노선에 대해 일종의 돌기물적 성격임이 틀림없었다”고 기술했으며 1948년 지리산 진압군 사령관을 지낸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역시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무장봉기 직후 경찰측에서 ‘무장대 외부 유입설’ 주장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에서 시작해 한라산 통행 금지가 해제된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간 이어진 제주4·3. 유혈 사태의 신호탄은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붉게 타오른 봉화였다. 

무장대 350명은 이날 새벽 도내 경찰지서 24곳 가운데 12곳(삼양·을 일제히 공격하고 서북청년회를 비롯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숙소 등을 지목해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 선거·단독 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 투쟁 등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이날 하루 동안 발생한 사망자는 14명(경찰 4·우익인사 등 민간인 8·무장대 2), 부상자는 25명(경찰 6·우익인사 등 민간인 19), 행방불명 2명, 무장대 생포 1명 등이다. 무장봉기 직후 경찰 측에서 무장대의 외부 유입설 등을 제기했으나 이내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낭설은 ‘북한군 유입설’, ‘북한 선박 출현설’, ‘소련 잠수함 출현설’ 등으로 이어졌고 당시 강경작전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한편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주최하고 사단법인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가 주관하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바로읽기’ 강연은 오는 10월 17일까지 격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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