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갑자기 김은국 소설 <순교자>가 읽고 싶어서 이틀 밤 사이에 전부 읽어버렸다. 한국에 있을 때 한번 읽고 일본에서는 두번 읽어서 세번 째 완독했다. 나이와 더불어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순교자>는 김은국이 30대 초기 1964년에 영문으로 쓴 첫 장편소설로서 주목을 끈 작품이다. 줄거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그해 평양을 점령한 유엔군과 한국 국군도 같이 평양에 입성했다. 일인칭 소설의 주인공 나는 정보장교 대위로서 상관인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 장 대령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

평양에서 실종된 14명의 목사가 인민군에게 납치당했는데 12명은 총살 당하고 2명은 살아남았다. 보고가 불확실해서 이 사실을 정확히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처형을 면한 2명의 목사는 평양에 살고 있었는데 나이 든 신 목사와 젊은 한 목사였다. 한 목사는 신 목사 집에 같이 살고 있었지만 정신이상자였다.

신 목사 집을 처음으로 방문한 나는 왜 두 사람만 살아남았는가에 대한 의문 제기에 대해 신목사는 신의 개입이 있었다고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는 나의 답변에, 그럼 운이 좋았다면서 설명을 꺼려했다. 평양의 기독교 신자들은 처형 당한 12명의 목사는 신을 믿고 따른 순교였으며, 살아남은 신 목사와 한 목사는 신을 배반했다면서 신자들은 신 목사 집을 찾아가서 돌을 던지는 행위까지 감행한다.

그러나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은 그와 반대로 순교자로 추앙 받는 12명의 순교자들이었다. 신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목사가 대부분이었고, 끝까지 신을 믿고 자기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신 목사는 살아남았다. 한 목사는 취조 중에 정신이상이 생겨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국군 당국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12명을 순교자로 추대하는 평양대시민대회를 개최하는 행사에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마지막까지 신을 믿고 신앙을 지켰다는 죄 없는 목사 12명을 처형한 인민군의 잔학상은 선전성의 대효과를 갖고 있었다. 다시없는 절호의 대의명분이었다. 신 목사도 이 행사에 참가하여 그들은 위대한 순교자였다면서 설교하고 살아남은 자신은 죄인이라고 회개한다. 아이러니의 극치였다. 

살아남은 신 목사의 신앙과 고뇌의 부조리를 심도 있게 파헤친 문제작 <순교자>였다. 노벨문학상 작가 펄벅은 하나의 사건을 소재로 신에 대한 인간다운 믿음의 보편성을 표현하고 신앙을 갈망하는 데서 비롯되는 의혹과 고뇌를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김은국은 그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면서 보기 드문 걸작이라고 평했다. 앞 이야기가 약간 길어졌다.  

<순교자>를 읽고 나서 이번 달에는 박유하 교수가 2014년에 발간한 일어판 <제국의 위안부>를 읽었다. 위안부였던 이용수 할머니가 두 차례나 가진 기자회견은 한국의 위안부 문제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렸다. 필자도 제주투데이에 <이용수 할머니의 '잃어버린 30년'(6월 1일)>이라는 기사를 썼었다.

그후, 신동아 프린트 미리보기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故배춘희 등 할머니들 정대협 두려워 대놓고 비판 못해>, CBS노컷뉴스 <박유하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30년, 무엇 이뤘나(6월 9일)> 등을 인터넷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동안 읽어야 하는데 하면서 밀어두었던 <제국의 위안부>를 이러한 기사를 읽고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공교롭게도 <순교자>를 읽고 나서 바로 읽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순교자>나 일제시대 전쟁 속의 <제국의 위안부>는 본질적으로 그 전쟁의 의미는 다르지만 전쟁의 부조리 속에 무엇이 진실인가를 독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공통성이 있었다. 우연히 두 권의 책을  계속 읽게 되었지만 <순교자>는 소설로서 <제국의 위안부>는 사실의 현장주의로서 진실 속의 진실을 파헤치고 있었다.

<제국의 위안부> 책을 처음 대했을 때 놀란 것은 번역판이 아니고 저자가 직접 일본어로 쓴 이중언어(二重言語)의 책이라는 사실이었다. 저자가 한국어로 쓴 책을 번역가가 일본어로 번역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사히신문사 학예부(문화부) 기자와 똑 같은 내용의 책을 저자가 2개국어로 썼을 때, 그중 한권의 책은 번역자 이름을 써야 하는데 본인이 직접 썼는데 번역자라고 쓰는 것은 이상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서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지내 왔는데 이번 일본판 <제국의 위안부>에는 번역가로서의 이름이 아니고, 그냥 박유하라고만 게재되어서 그 의문을 풀게 해주었다.        

저자의 후기까지 깨알 같은 활자로 발간한 324쪽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필자의 소감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조선인 위안부의 입문서이며 또 하나의 위안부 교과서였다." 이 책은 그 동안 한.일관계에서 언제나 걸림돌이었던 위안부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각도로 분석한 위안부의 조감도였다.

위안부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쓴 글을 자료로 인용하고 책에 게재한 내용의 방대함과 치밀성에 놀랐다. '참고문헌' 인용 소개가 10쪽에 달했는데 그 속에는 한.일 양국에서 발간된 원서와 소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한.일 양국에서 발행된 책을 이중언어의 실력의 진가를 발휘하여, 이 자료들을 본서(本書)에 인용 게재하면서 객관적 시각으로 핀세트로 꼭 집어서 분석한 부분은 날카롭고 정확했다.

<제국의 위안부>의 부제는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이었다. 위안부들의 그 당시 생생한 기억들은 세월과 함께 잊혀지는 것이 아니고 인위적인 행위로 그 기억을 소거(消去)하고 있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소거가 아니고 필자는 과격한 표현일런지 모르지만 '기억의 암살'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떠한 극한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그 속에서는 살아가는 일상이 있다. 그 일상이 비현실적이드라도 그 속에는 나름대로의 희노애락이 있다. 이것을 경험했던 그대로 당시의 감정을 되살리면서 술회하는 기억의 회상이 현실과 안 맞는다고 제삼자가 수정이나 망각을 요구하고, 또 본인 스스로가 왜곡한다면 진실은 더욱 멀어지고 만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에 대한 책임론의 흑백 논쟁 속에서 결론적으로 국가의 책임론, 즉 제국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과정의 검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기성조직이나 제단체의 주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세하게 다룬 점도 높게 평가해야 힐 것이다. 위안부 모집에서부터 개입하는 민간인 중개인과 포주에 대한 시각과 인식도 재음미 할 수 있는 내용이들이었다. 

한국 정부와 기성 조직이 위안부에 대한 원리주의적인 대일 정책은 일본의 양심 세력까지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이번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으로 그 기성조직 단체 '정의기억연대'의 비리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위안부 문제를 세계화 시킨 공로는 크지만 주객이 전도된 과정의 비리는 엄중하게 캐야 한다.

일본에서 일제시대의 영화나 드라마가 일본인들만이 등장하는 내용이 방영될 때에는 군인이나 정신대 요원들은 국가나 국가 권력을 이용한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시청자들은 그 부조리에 대해서 울분을 토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내용에 식민지였던 당시 조선인들이 등장했을 때, 일본인 시청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으로서 그것을 묻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떻게 이러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고국의 법정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위안부 당사자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잘 썼다고 박수를 쳐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제대로 할 말도 못하고 눈치 보면서 고소한 위안부 할머니, 그 분들을 지원하는 배후 세력들은 다시 한번 이 책을 정독하고 음모가 넘치는 위선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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