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광양당신은 비와 바람을 일으키는 신이다. 앞에 소개한 차귀도 전설에서와같이 화가 나면 강풍을 일으켜 배를 뒤집어 버리는 무서운 신이기도 하다. 어쩌면 제주사람들은 광양당신을 통해서 제주를 침범하는 세력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광양당신의 활약을 통해 민심을 엿볼 수 있는 신화가 하나 더 있다. 광양당신의 형제신이기도 한 광정당신의 본풀이가 그것인데, 여기에서도 주인공은 광양당신이라 할만 했다. 다음은 현용준의 <제주도무속자료사전>에 수록된 광정당본풀이를 정리한 것이다. 

세 신인이 솟아나온 세 개의 구멍 삼성혈. (사진=김일영 작가)
세 신인이 솟아나온 세 개의 구멍 삼성혈. (사진=김일영 작가)

“큰형님은 제주시 광양당신이고, 둘째는 정의 서낭당신, 막내는 대정 광정당신이다. 세 형제가 활을 쏘아 차지할 땅을 가르는데, 큰형님이 활을 쏘니 정의‧대정 사이에 떨어져 경계를 가르고, 둘째가 쏜 화살은 제주‧정의 경계를 가르고, 막내가 쏜 화살은 제주‧대정 경계를 갈랐다. 그래서 큰형님은 광양당에 좌정하고, 둘째는 서낭당에 좌정하고, 막내는 광정당에 좌정하였다. 

고성리 항파두리에 김통정이 들어와 토성을 쌓고, 집집마다 세금으로 재 닷 되와 빗자루 하나씩 거두었다. 김통정은 장수들이 자신을 잡으러 몰려오는 걸 막기 위해 매일 토성 위에 재를 뿌리고 말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채찍을 내리쳤다. 말이 토성 위를 달리자 재가 날아올라 세상이 왁왁하니 천지 분간이 어려워졌다. 

이에 광양당신과 서낭당신, 광정당신 삼형제가 제주를 어지럽히는 김통정을 잡으러 갔다. 세 신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걸 안 김통정은 무쇠 방석을 바다에 던지고는 그 위에 날아가서 앉았다. 이를 보고 있던 사해(四海)용왕이 무쇠 방석을 잡아당겼다. 무쇠 방석이 물에 가라앉자 김통정은 매가 되어 달아났다. 

광양당신과 서낭당신, 광정당신 삼형제도 새와 모기가 되어 김통정을 쫓아갔다. 머리 위에서 새가 파닥거리고 모기가 앵앵거리니 김통정이 뭔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김통정의 목에 덮였던 비늘이 들리면서 틈이 생겨났다. 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던 비늘이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새가 되어 날아간 광양당신이 칼로 비늘 틈을 찔렀고, 마침내 김통정은 피를 뿌리며 숨이 끊어졌다.” 

김통정은 고려 말 원나라의 지배에 반대하여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로 내려온 실존 인물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김통정이 제주도민들을 동원해 쌓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 토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성역화했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에게는 김통정이나 이를 토벌하기 위해 내려온 여몽 연합군이나 외부세력으로 이중삼중의 고초를 겪게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김통정을 영웅으로 그리면서도 그를 잡아 죽이는 서사를 전설이나 신화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김통정 전설에 광양당신을 등장시켜서 김통정을 처단하게 하고 있다. 광양당신이 제주와 한라산을 대표하는 신으로 외부세력을 무찌르고 제주 사람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광양당신은 비와 바람을 일으키는 무서운 신이면서도 제주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기도 한 것이다.

산천단 입구에 있는 노송. (사진=김일영 작가)
산천단 입구에 있는 노송. (사진=김일영 작가)

#파괴된 광양당과 삼성신화 

광양당제는 차귀당제와 함께 탐라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당굿이었다고 한다. 국가에서 도민의 무속적인 산신 신앙을 흡수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국가의 시책과 관계없이 광양당신을 본향당신으로 받들면서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였다. 본향당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과 관련한 모든 일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형상 목사는 유교적 제의를 장려하면서 광양당을 파괴하고 더 이상 무속의 제를 올리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이렇게 중앙에서 내려 온 목사가 신당을 불태우고 당굿을 금지했음에도 제주 사람들은 태풍이 불어 농사를 망치거나 하면 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아 광양당신이 노했다고 생각하며 몰래 제사를 지냈다. <우암선생문집>에 이와 관련한 글이 있다.

“섬의 풍속은 삼성개국 이래로 오로지 귀신을 숭상하였다. 제주성 남쪽 광양당을 조종으로 삼고, 삼읍 대소 촌락에 각각 신당이 있어 매년 세시 제일마다 징과 북을 울리고, (……) 지극한 정성으로 굿을 하여 신을 놀린다. 때문에 태풍과 고기잡이와 재난이 없었고, 도민은 모두 부자의 넉넉함이 있었다. 

이형상 목사가 광양당을 불태운 뒤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에 홍수‧가뭄‧태풍‧냉해 등 재난이 없는 해가 없었고, 작년에는 특히 심했다. 대흘리에 영험한 여자 심방(女巫)이 있어 천신과 더불어 놀고, 잡귀와 문답하니, 그녀의 명을 즉각 듣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광양당 당신이 그녀의 몸에 빙의하여 이르기를, “금년 나에게 제사하지 않으면 큰 비를 내리게 하거나 바람을 일으켜 도민을 모두 섬멸할 것이다.”라 하였다.  

(문무병, <제주도 본향당 신앙과 본풀이>에서 재인용)
  
외부세력에 의해 파괴되고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당한 한라산신! 이제 아무도 제를 올리지 않으니, 비바람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제사를 하지 않으면 모두 섬멸해버릴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는 신의 분노가 무섭기보다는 되레 처연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광양당신의 분노는 곧 제주 사람들의 분노가 아닐까. 자신들의 신앙과 공동체 문화를 탄압하는 외부 세력에 대한 분노를 광양당신의 서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광양당은 이형상 목사에 의해 파괴된 후 이제는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에 대해 민속학자 문무병은 <탐라지>의 “광양당은 삼을라(탐라국 시조) 신을 모신다”는 기록을 근거로 현재 삼성혈 사적지가 광양당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이기도 한 삼성혈은 탐라건국신화의 유적지인 동시에 광양당신이 좌정하는 신당이었다는 것이다. 

산천단 입구에 있는 노송. (사진=김일영 작가)
산천단 입구에 있는 노송. (사진=김일영 작가)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본향당신을 모셨던 광양당이 탐라왕국의 시조신을 모신 사적지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성혈 사적지가 광양당이었든 아니었든, 광양 지역을 생각하면 삼성혈이 떠오르고, 삼성혈을 생각하면 광양당이 떠오를 정도로 나에겐 광양당과 삼성혈의 이미지가 하나로 겹쳐진다.

어린 시절 제주에서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문화유적지는 삼성혈과 산천단, 그리고 항파두리 항몽유적지가 전부였다. 이 중에서 그래도 사는 곳 가까이에 있다고 몇 번이라도 더 다녀 본 곳이 바로 삼성혈이다. 그때마다 어린 나에게도 평범하지 않은, 뭔가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 이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삼성혈을 찾았는데, 어렸을 때 느꼈던 신성한 분위기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 많이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삼성혈을 둘러싼 숲이 여전히 울창하고 깊었다. 탐라를 세운 세 신인이 솟아난 곳이라는 삼성혈 사적지, 제주사람들이 광양당신을 모시던 성 숲이 여전히 성스럽고 숭고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어찌 반갑고 고맙지 않으랴. 

이형상목사가 광양당제를 금지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한라산제로 수용되었다는 기록(박찬식, <제주민란연구>, 도서출판 각)을 발견하고 산천단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서귀 지역 답사를 하고 돌아오면서 들른 산천단에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소나무가 우리를 맞았다. 산천단을 조성할 때 심어 놓아 수령 500년이 넘는다는 곰솔들이다. 

해송이라고도 불리는 이 소나무들은 천연기념물 1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키가 무려 19m에서 23m 정도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노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빈 제단을 지키면서 오랜 세월 버티어오느라 힘겨웠는지 철 기둥에 의지하여 간신히 서 있었다. 세월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구부러진 허리에 실려 있어 보기만 해도 버겁게 느껴졌다. 세상 풍파를 견뎌 온 연륜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니 우리는 두 손 모아 고개를 수그렸다.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작가 여연. 

제주와 부산에서 30여 년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퇴직 후에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신화 연구로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다. 생애 첫 작품으로 2016년 <제주의 파랑새>(각 펴냄, 2016)를 출판하였고,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7년 출판산업진흥을 위해 실시한 ‘도깨비 책방’ 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연구소’의 신당 답사를 주도하면서, 답사 내용을 바탕으로 민속학자 문무병과 공저로 <신화와 함께하는 제주 당올레>(알렙 펴냄, 2017)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 연구모임을 1년간 진행하고 2018년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른 책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 펴냄, 2018)를 3권으로 출간하였고 서울과 부산,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제주신화 테마길을 여는 등 제주 신화 스토리텔링 연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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