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선흘2리 마을 임시총회 중 향약 개정의 건에 대한 거수 투표 중인 모습(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사무소에서 거수투표를 하고 있는 주민들. 2019.8.27.(사진=김재훈 기자)

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뜻을 모을 수 있는 회의를 열게 해달라며 법원에까지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웃지 못할 사태가 일어난 곳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2리. 마을이 생겨난 이래 가장 큰 현안인 제주동물테마파크 개발사업을 두고 주민 갈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논의가 필요한 시기이지만 정작 정현철 이장은 총회 소집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 

마을총회는 마을 구성원인 주민 모두가 참여해 주요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필요한 경우 의결을 진행하기도 하는 마을회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통상 1년에 한 번 열리는 정기 총회에선 주로 지난 1년간 마을 회계 보고와 함께 마을의 장이나 감사를 선출하는 안건 등이 다뤄진다. 

이밖에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야 할 사안이 생기면 수시로 임시총회를 열기도 하는데 마을 자치규약(향약)에 따라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선흘2리의 경우 마을회 향약 제12조에 리장이 7일 이내 임시총회를 소집하는 경우로 ‘리민 20인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제3호)’가 명시돼 있다. 

#정 이장, 마을총회 결정사항 뒤집고 사업자 측으로

선흘2리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마을로, 조천읍은 세계 최초 람사르습지도시로 지정될 만큼 이 지역은 지질학·생태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곳이다.

이곳에 대명그룹 계열사 중 유원지와 부동산 사업 등을 운영하는 ㈜대명티피앤이가 지난 2017년부터 대규모 사파리형 동물원과 숙박시설이 들어서는 제주동물테마파크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발언 중인 정현철 선흘2리 대명제주동물테마파크반대대책위원장(사진=김재훈 기자)
지난해 4월 14일 제주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정현철 선흘2리 이장. 당시 정 이장은 대명제주동물테마파크반대대책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 주민 대다수가 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자가 강행하려 하자 마을회는 지난해 4월 9일 임시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서 마을회는 동물원 사업에 반대하기로 뜻을 모았고 정현철 이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반대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다음 달인 5월 15일, 사업에 찬성하는 일부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임시총회가 다시 열렸다. 이 총회에서도 마을회가 동물테마파크 사업에 반대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이 났고 반대위 활동을 위해 마을회 기금 200만원을 지급하는 내용도 통과됐다. 

하지만 같은 해 7월 26일 정 이장은 마을회 동의 없이 사업자와 만나 ‘지역상생방안 실현을 위한 상호협약서’를 체결, 돌연 사업 찬성 측으로 돌아서게 됐다. 이어 사업자 측에 “반대위는 해산됐다”는 허위 주장을 공문으로 보내는 등 마을총회 결정사항에 위배하는 행위를 지속했다. 

이에 마을 주민(마을회 구성원) 20여명이 지난해 8월 협약서 무효 및 이장 해임 안건 등을 논의하는 총회 소집을 요구했으나 정 이장은 이를 무시했다. 이는 ‘이장은 리민 20인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7일 이내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향약에도 어긋난다. 

선흘2리 1~3반 반장 및 개발위원 일동과 선흘2리 대명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회는 22일 성명을 발표하고 "선흘2리 주민들은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선흘2리 전・현직 이장들의 성명서에 분노한다"며 "앞으로는 마을의 화합을 말하면서, 뒤로는 주민을 고소하는 정 모 이장은 당장 물러나라"라고 촉구했다.(사진=선흘2리 대명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회 제공)
지난해 8월 22일 선흘2리 1~3반 반장 및 개발위원 일동과 선흘2리 대명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회는 주민 몰래 사업자와 상생협약서를 체결한 정 이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선흘2리 대명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회 제공)

#“총회 소집은 이장만…?” 향약 독소조항에 주민들, 결국 법원 문 두드리다

문제는 선흘2리 향약에 따르면 총회 소집 권한은 이장에게만 있다는 점이다. 해당 향약 제15조에 따르면 이장 및 감사의 선임과 해임은 리민총회에서 의결하도록 하고 있다. 이장 해임 안건을 다루는 총회를 당사자인 이장이 소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독소 조항인 셈. 

반대위 주민은 지난 5월 12일 또다시 정 이장에게 주민총회 소집요구서를 보냈다. 향약의 개정과 이장·감사의 선임과 해임, 상호협약서 무효 확인의 건 등을 안건으로 다루기 위한 회의다. 

향약에 따르면 정 이장은 7일 이내 즉, 같은 달 19일까지 주민총회를 소집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 이장은 “총회에 상정할 안건들이 부적절하다”며 재차 임시총회 소집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주민들은 자비를 들여서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가며 지난 5월 법원에 ‘임시총회 소집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1년이 넘도록 마을 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마을총회가 반드시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이장이 회의 소집을 거부하고 있으니 주민이 회의를 열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내용이다.   

정현철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정현철 선흘2리장. (사진=김재훈 기자)

#정 이장 “12월 전까진 마을총회 개최 계획 없어”

이와 관련 정 이장은 최근까지도 마을총회를 개최할 계획은 당분간 없을 것이라 밝혔다. 

지난 27일 정 이장은 선흘2리 리사무소(마을 복지회관)에서 동물테마파크 사업과 관련한 입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8월 중으로 개발위원회를 소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을총회 소집 여부와 관련해선 “마을총회에서 논의할 부분이 없다. 마을 현안 사항은 개발위원회에서 논의할 것”이라며 “다만 회계 감사를 보고해야 하는 내년 1월 정기 총회 전에 감사를 선출하기 위한 임시총회를 열긴 해야 한다. 아마 12월쯤이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올해 총회를 열지 못한 이유는 코로나 때문에 아예 회의 같은 걸 못하는 상황이었고 반대측 주민들이 회의를 열려고 하면 파행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24일 오전 제주도의회 의장 집무실에서 좌남수 의장(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지역사회 각종 난개발에 반대하는 도민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도의회 제공)
24일 오전 제주도의회 의장 집무실에서 좌남수 의장(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지역사회 각종 난개발에 반대하는 도민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선흘2리 주민이 참석해 마을총회 소집과 관련한 애로사항을 토로했지만 조천읍 지역구를 둔 현길호 의원은 “도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답했다. (사진=제주도의회 제공)

#제주도·도의회 “마을이 알아서 할 일” 뒷짐

마을 주민 다수가 회의를 열어달라고 법원 문을 두드리기까지 제주도는 물론 도의회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선 “마을이 알아서 해결해야할 일”이라며 나서지 않고 있다. 

조천읍을 지역구로 하는 현길호 의원(더불어민주당)은 “마을에서 찬성과 반대 의견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순 없다”며 “특히 이장 해임과 관련해선 결국 집행부가 권한을 가지고 있고 도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마을에서 스스로 갈등을 풀어나가며 향약의 독소 조항 등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지금은 경찰 수사 등 법적인 판단이 나오기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앞으로 제주에선 선흘2리와 유사한 갈등 사례가 계속 생길 것인데 이번 선흘2리가 좋은 선례로 남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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