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오석불을 둘러 보면서 신화연구를 하는 후배에게 오석불과 같은 돌미륵이 제주도에 많이 남아 있느냐고 질문을 했다. 제주도 마을마다 당이 꽤 많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 새마을운동 기간에 본격화된 ‘미신타파’ 운동으로 당신앙은 크게 약화되었다고 대답했다. 도시개발과 함께 마을 길을 넓히면서 당에 모신 신상도 파괴되었고, 심지어 일제에 의해 밖으로 유출된 것도 많아 제주도에서 당의 신상을 볼 수 있는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신성함이 있는 오석불을 오랫동안 마음에 담으려고 거듭 살피는 순간, 한 커플이 ‘오석불’ 제단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의식해서인지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아 우린 서둘러 자리를 비켜 주었다. 

민간 신앙터에 안치된 4·3 희생자 위령비
 
화천사 오석불 신당에서 내려오면, 현대식 돌담으로 둘러싸인 ‘4·3 희생자 위령비’와 마주하게 된다. 위령비 아래 제단 양쪽으로 하얀 사자 석상이 있는데 화려함과 위엄이 서려 있고 무언가를 지키려는 듯 단단히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100여 명이 훨씬 넘는 희생자 이름을 새긴 각명비도 볼 수 있다.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민간 신앙터인 화천사 오석불 옆에 안치된 동회천 마을 4·3 희생자 위령비
민간 신앙터인 화천사 오석불 옆에 안치된 동회천 마을 4·3 희생자 위령비. (사진=김일영 작가)

이 4·3 희생자 위령비가 화천사와 오석불 바로 옆에 위치한 이유는 아마도 억울하게 돌아가신 원혼을 위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석불에 담긴 내력과 의미를 알고 나니, 위령비를 조성한 마을 사람들의 깊은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옛날부터 오석불은 마을에 크고 작은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비념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 마을공동체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다. 4·3 희생자 위령비를 민간 신앙터와 가까이에 둔 것은 4·3 당시 무고한 영혼과 넋을 위로하고, 더는 걱정 없는 사후세계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 여겨졌다.
 
처음 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주변의 올레길과 과수원에서 울창한 대나무숲을 볼 수 있었는데, 4·3 당시 무참하게 불타서 없어진 마을과 집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 어르신들은 험한 난리 속에서 아무런 죄없이 쫓겨났던 고향으로 돌아와, 폐허가 되다시피 한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생죽음을 당해 차마 눈도 못 감고, 원통한 혼령으로 떠돌고 있을 넋을 위로하는 4·3 위령비 문구를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숙연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새미숭물과 새미숲 

4·3 희생자 위령비를 둘러보고, 바로 왼쪽에 있는 좁은 골목길로 올라 새미숲으로 발길을 향했다. 막바지 감귤 수확철인지 길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고 고요하기만 했다. 마을의 골목길엔 대나무숲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새미숲에 들어서기 전, 돌무더기로 둘러싸인 샘물터(물통)를 만났다. 이 샘물터는 자연 상태를 최대한 살린 옛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회천 새미숭물’이라고 불려지는 이 샘물터의 돌담 벽에 그 내력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부착되어 있다. 

이 물은 순수한 자연생수로 60년대 중반까지 마을 사람들이 음용수로 이용했는데, 예전에 이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며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게다가 이 물로 인해 미인과 훌륭한 인물이 탄생했고 무병장수했다는 내용은 샘물터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오석불 석불제와 득남을 기원하며 기도할 때 사용했던 새미물. (사진=김일영 작가)
오석불 석불제와 득남을 기원하며 기도할 때 사용했던 새미물. (사진=김일영 작가)

샘물터의 물통 바닥은 수심이 얕아 물이 고여서 정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바닥을 유심히 관찰하니 소량이긴 하지만 암반 밑으로 산물은 흘러나오고 있다. 샘물터의 입구에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고, 위쪽엔 물구덕(물항아리를 넣어 지고 다니는 물바구니;편집자)을 올려놓았던 물팡(물항아리를 놓는 돌 선반;편집자)이 보였다. 

문득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물허벅(물항아리;편집자)이 떠올랐다. 물이 귀한 시절, 두 분 모두 샘물터에 가서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이 고된 하루의 시작이었다고 옛날을 회상하시곤 했다. 특히 어머니는 물허벅을 구덕에 지고 집에 오면 땀범벅, 물범벅으로 옷이 다 젖어 결국 눈물범벅이 되었다는 뼈 아픈 우스갯소리도 하셨다. 동회천 마을 여자들 또한 물구덕을 등에 지고, 이곳 샘물터에서 물을 길어 나르며 힘든 아침을 맞이했으리라. 

예전에 이 샘터의 물은 부정을 씻어내는 정화수로, 마을의 번영을 위한 제수로 오석불 석불제 때에 사용되었고, 득남을 기원하는 여성들이 새벽에 이 신성한 새미물을 떠다가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지하수 개발 등으로 인해 샘물이 많이 말라버린 모습이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게 샘물터가 훼손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남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이 샘물 말고도 두세 개의 샘물터가 더 있었다 하니, 한라산과 오름에서 내려온 물줄기들이 이곳에서 솟아올라 샘터가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무엇보다 수백 년 전에 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 이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예전에는 ‘새미’ 또는 ‘ᄀᆞ는 새(가는 새)’가 마을의 이름이었다. 얼마나 어여쁜 이름인가! 이후 생명수인 물을 중심으로 생긴 마을 이름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샘물맛이 일품이다’해서 ‘천미(泉味)’라 불리다가 나중에 공식 지명이 한자어로 바꾸는 바람에 ‘회천(回泉)’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은 ‘새미’나 ‘ᄀᆞ는 새’라는 옛 지명을 부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옛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젓한 새미숲길을 걷다. (사진=김일영 작가)
호젓한 새미숲길을 걷다. (사진=김일영 작가)

숲 입구 양쪽에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과 낭만적인 연인들을 위한 그네가 보기 좋게 자리하고 있다. 산책하기 좋게 정비된 돌담길 바닥은 친환경 소재인 식생 매트로 깔려있었다. 숲은 마치 시크릿 가든처럼 펼쳐졌다. 이 기분을 표현하자면 요즘 말로 ‘소확행’ 임이 확실하다. 흙냄새인지, 풀냄새인지, 마치 산림욕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숲속에서 중년으로 보이는 한 부부를 만났다. 뭔가를 열심히 줍고 있었는데 ‘구실잣밤나무’ 열매였다. 제주어로는 ‘제밤’이라 하는데 고소한 잣과 밤 맛이 함께 나는 도토리다. 벌써 한 손에 봉지 한 가득 담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제밤으로 만들어 먹는 도토리묵 맛의 향수를 아는 부부를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겨울철임에도 숲속은 따뜻하고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오밀조밀한 돌담길, 신기하게도 바위틈에 뿌리 내린 나무들, 원시적인 양치식물, 안새통 습지, 맨발로 걸어도 좋음직한 붉은 화산송이길 등 곶자왈 특성이 두루두루 갖춰 있다. 

 

홍죽희.

홍죽희.
제주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30여 년을 재직하다 2020년 2월 명예퇴직했다. 대학 시절 마당극 운동단체인 극단<수눌음>에 가입, 외지 자본에 의한 제주의 토지 잠식을 다룬 ‘땅풀이’와 1932년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 해녀 투쟁을 다룬 ‘ᄌᆞᆷ녀풀이’ 등에 출연하면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육지와는 달리 제주의 마당극은 신화를 바탕으로 굿에 의해 전개되는 특징이 있어 자연스럽게 제주의 신화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지금도 틈틈이 신당 기행을 다니고 있다. 독서모임<아랑ᄒᆞ라>와 아코디언 모임<바숨>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인문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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