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 노고록이적십자봉사단장(사진=김재훈 기자)
김재홍 노고록이적십자봉사회 단장(사진=김재훈 기자)

“IMF로 인해 사업이 부도가 나고 업장을 정리하면서 사무실 서랍을 열었는데, 예전에 봉사활동을 갔던 요양원에서 보내온 카드 7장이 있었어요. 7년 동안 못 갔던 거죠. 돈을 더 벌어서 찾아가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카드를 보고서 할머니들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재홍 노고록이적십자봉사회 단장을 자원봉사자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은 크리스마스카드 7장이었다. 김재홍 단장이 IMF 이전 합기도장을 하던 시절 꼬마들 데리고 서귀포 성요셉 요양원에 봉사활동을 처음 나갔다. “아이들이 합기도 시연을 하는 모습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주 가야지 했는데, 많이 바빴죠. 사실 봉사보다 사회적 입지를 다지는 데 욕심이 많았고요. 그러다 1999년 12월 30일 IMF 영향으로 부도가 나서 사업을 접었습니다. 정리해서 나오는데 책상서랍에 보니 크리스 마스 카드 7장이 있더라고요. 요양원에서 매년 보내주던 카드였어요. 카드를 보면서 생각해보니, 7년 동안 못 갔더라고요.”

미안했다. 더 벌어서 가겠다는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진작 들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IMF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멀리서 아는 사람을 봐도 위축되곤 하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카드들을 보았고, 요양원을 찾아 갔다. “어르신들이 불편해 하는 곳을 여기저기 만져드리는데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오랜 시간 운동을 하며 지낸 그였다. 합기도와 보디빌딩을 하며 헬스클럽도 운영했던 김재홍 단장은 사람의 신체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다. 어르신들의 몸 곳곳을 성심껏 어루만져드렸다.(몸에 대한 그의 관심은 현재 그가 보유한 자격증에서도 알 수 있다.  요가,필라테스강사. 보디빌딩 생활스포츠지도사. 크로스핏지도사. 카이로프락틱강사. 스포츠시아추강사 등)

“그러다 어느날 서귀포복지관에서 연락이 왔어요.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세신사들을 상대로 한 무료강의였다. 그렇게 3개월 동안 매주 3회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 자료도 손수 만들었다. “다음 기수에는 교회 권사 집사 분들이 많이 왔어요. 내가 양로원에 혼자 간다 그러니, 동참하게 해달라, 하시더라고요.” 그때를 기점으로 김재홍 단장과 함께하는 봉사자들이 늘었다.

현재 그는 운동과 체형교정을 가르치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봉사자들과 함께 운동하고 공부하는 유웰니스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유웰니스피트니스센터는 2017년 6월 1일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수익이 남으면 다시 봉사활동으로 환원하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수익이 많이 나지는 않는다.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운동과 수기요법을 가르친다. 센터는 단순한 운동센터가 아니라, 일종의 봉사자 양성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훈련하고 교육받은 분들을 봉사자로 끌어들이고 하고 기존 봉사자들의 역량을 강화하기도 하는 공간이에요. 매월 자체 교육도 진행하고요.” 자원봉사활동을 오래 해온 봉사자들은, 어떻게 해야 더 잘 봉사할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한다. 그런 의미에서 센터는 봉사자들의 자기계발을 돕는 공간이기도 하다.

봉사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김재홍 단장
봉사자를 대상으로 한 역량 강화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김재홍 단장

김재홍 단장은 요양원, 교도소 등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교도소에서 스킨십을 통한 인성교육을 진행해왔다. “한때의 실수로 교도소로 들어간 이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삶의 의미를 몸소 느끼고 사회에 나와서 봉사자로 살아가도록 돕고 싶어요.” 그러나 코로나19는 김재홍 단장의 봉사활동 생활에도 변화를 야기했다. 양로원이든, 교도소든 거의 갈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김 단장은 봉사단원과 함께 매주 취약계층에게 지원하는 마스크를 소포장 하고 나누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독거노인 수요를 조사해서 소규모로 방문해 케어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봉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김 단장에게 물었다. “오래 전 일인데요. 요양원에서 한 할머니가 우리 총무 말고는 아무한테도 수기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총무는 그날 오지 않았거든요. 근데 할머니는 모든 봉사자들의 손을 다 거절하더시더라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제가 할머니한테 갔죠. 오랜 시간 공부하고 봉사하며 가르쳐왔느니 저도 나름으로는 수기치료 최고 기술자라고 자부하고 있지 않았겠어요?(웃음) 근데 제가 봐드리겠다 하고 갔는데, 아 딱 거절하시더라고요.”

자타공인 ‘최고의 손’ 김 단장을 할머니가 거부한 이유는 뭘까. “그러다 어느날 할머니가 뇌출혈을 일으켜 병원에 오래 입원했다 다시 돌아왔어요. 소식 듣고 할머니 계신 침상으로 찾아갔지만 아무도 못알아보고 의사소통도 못하셨어요. 손발도 움직이지 못하시고... 그런데 할머니 눈빛이 총무에게 향하더라고요. 옆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할머니가 총무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다들 놀랐죠. 할머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그때 느꼈어요.”

김재홍 단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수기치료 기술을 잘 아니까 효율적으로 잘 해왔던 거죠. 아픈 부분을 찾아서 육체적 고통 덜 수 있도록 만져드리는 거죠. 필요한 만큼요. 그런데 할머니가 기다린 총무는 제가 가르친대로 기술적인 수기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손끝 하나하나 만져드리고, 또 만져드리고 하더라고요. 저는 어르신들의 몸 불편한 곳을 만져드렸지만 우리 총무는 할머니 마음을 만져드렸던 거죠. 그때 많이 깨달았어요. 봉사란 효율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정성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바뀌었죠.”

자원봉사는 김재홍 단장이 다시 한 번 사회적으로 재기하는 기회도 됐다. 김 단장은 봉사를 통해 얻은 것이 많다면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는 올해 제주형 웰니스 테라피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제주형 지압'에 대한 연구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박사에 도전할 것이냐는 질문에 활짝 웃음을 보였다. “석사 학위 따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박사를 따려면 얼마나 더 걸리려나?”

응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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