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작가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함덕에도 잠수(潛嫂)와 어부들을 지켜주는 신이 좌정해 있다. 함덕리 본향 알카름 서물당은 함덕리 북쪽 바닷가 동네인 알카름(아랫동네)에 위치해 있다. 신당을 찾기 위해 골목길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앞서 걷고 있던 친구가 신축건물 공동주택 앞에서 나에게 손짓하며 신당을 가리켰다. 공동주택인 콘크리트 벽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신당이라니! 

나는 당황하는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물당(三水神堂)’이란 안내 간판이 없었으면 외관상으로는 당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 제주 신당이 돌담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데 이 당은 최신식 콘크리트 벽으로 개조해 놓고 있었다.

마을 길을 넓히고 아파트를 지으면서 돌담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라 했다. 이 ‘서물당’은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 울타리를 지금처럼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세월이 흐르면 신당이 사라지기도 하고 개발과 함께 파괴되기도 한다. 

그나마 이 당은 함덕리 문화 지킴이들에 의해 마을에 남겨진 것이다. 도시개발과 문명에 밀려 당의 모습은 변모했지만, 이렇게라도 마을의 문화유산인 신당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공동주택인 콘크리트 벽에 나란하게 붙어 있는 함덕리 본향 알카름 서물당. (사진=김일영 작가)
공동주택인 콘크리트 벽에 나란하게 붙어 있는 함덕리 본향 알카름 서물당. (사진=김일영 작가)

당 안을 살펴보니 자연석을 다듬어 제단을 만들고 조그맣게 궤를 마련하였다. 미륵돌이 당의 신체라 해서 아무리 찾아봐도 제단 아래 묻어 놓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제단 주변에 소주병과 막걸리병들이 보이고, 사과와 배 등 과일이 들어있는 꾸러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사람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이 당의 미륵돌은 용왕국의 무남독녀로 김첨지 할아버지의 긴 낚싯줄에 걸려 올라 온 ‘미륵먹돌’인데, 해녀와 바다를 오가는 배를 돌봐주고 어부들이 낚시질을 잘 하게 해 주는 어업수호신이라고 안내가 되어 있다. 

신당 안에 ‘한태흥표석’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눈에 띤다. <2008 제주신당조사>를 찾아보니 예전 신당의 돌담 틈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비석이다. ‘한태흥’은 실제 1881년생 어부 출신으로 이 ‘서물당’을 만들어 미륵불을 봉안한 사람이라고 한다. 어부와 해녀의 안전을 기원하며 마을을 위해 나선 분이기에 그 공적과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함덕리 본향 알카름 서물당 본풀이

동편 왕석 서편 황석은 서울 먹자골 논노물서 솟아난 급서황하늘이 좌정하고 있다. 알카름 서물한집은 동해용궁 황제국의 공주님이다. 김첨지하르방이 서물날(음력 열하루와 스무엿샛날의 조수) 백발술 긴 낚시줄에 천근이나 되는 뽕돌(낚시돌)을 가지고 배에 타서 고기 낚으러 갔는데, 낚싯줄에 미륵돌이 올라왔다. 온종일 낚아도 미륵돌만 올라오니 화가 나서 모두 물에 던져버리고 돌아왔다. 

두물날(음력 열흘과 스무닷샛날의 조수)에도 고기 잡으러 바다로 가니 낚싯줄에 걸려 오는 것은 같은 미륵돌이었다. 자꾸 미륵돌만 올라오니 더 이상 고기 잡을 마음이 나지 않아 잠깐 눈을 감았는데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러자 꿈에 용왕 공주님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동해용궁 무남독녀 딸아기이다. 인간 자손을 도와주려고 인간 세상에 나왔느니라. 그러니 나를 알카름 폭낭 아래 모셔서 ᄒᆞᆫ물(음력 아흐레와 스무나흗날의 조수), 두물, 서물 날 나를 위하라. 그러면 일만 잠수를 살펴주고 가는 배 오는 배 낚시배 잘 되게 해 주마.”

꿈에서 깬 김첨지하르방은 그제야 미륵신을 모시기 시작하였다. 이 당은 일만잠수 일만어부를 살펴준다. (<제주도무속자료사전>(현용준, 도서출판 각, 2007)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함.)

서물당을 만들어 미륵불을 봉안했다는 '한태홍'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오른쪽)이 보인다. (사진=김일영 작가)
서물당을 만들어 미륵불을 봉안했다는 '한태흥'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오른쪽)이 보인다. (사진=김일영 작가)

김첨지하르방은 백발술인 낚싯줄로 무거운 미륵돌을 끌어올렸다고 하니, 백발술은 절대 끊어지지 않고 단단한 줄이란 것 알 수 있다. 더욱이 천근이나 되는 뽕돌을 배에 싣고 고기잡이를 다닌다고 했으니 김첨지영감은 경력이 대단한 베테랑 어부였지 않나 싶다. 

이곳을 ‘서물 할망당’이라 불러 그 의미가 궁금했는데 서물은 음력 조수를 일컫는 물때의 단위였다. 제주사람들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주기적인 바닷물의 상태에 따른 날짜를 흔히 ᄒᆞᆫ물, 두물, 서물이라 부르는데 이 당은 서물에 맞춰 당제를 지내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김첨지 영감의 낚싯줄에 걸려 연달아 올라온 미륵먹돌이 나중에 알고 보니 동해용궁의 딸로 인간 자손들을 도와주려고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다른 당 본풀이에도 가끔 동해용궁의 딸이 등장하는데, 서물당에도 어김없이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바닷가 마을이 형성되고 신을 모실 때 바다를 다스리는 신인 동해 용왕의 딸을 잘 모셔 극진히 대접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강한 소망이 담긴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김첨지 영감은 꿈에 현몽한 사실을 알려 다른 어부들과 상의를 했다. 그가 모셔온 미륵은 가난한 어부들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줄 신성한 돌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 미륵돌을 신으로 모시며 서물당이 만들어졌고 마을 사람들도 그 뒤를 이어 당을 믿게 되었다.

자연석으로 만든 제단과 신령이 드나드는 궤의 모습. 궤 안에 사과와 감이 올려져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자연석으로 만든 제단과 신령이 드나드는 궤의 모습. 궤 안에 사과와 감이 올려져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지금은 이곳 서물당에서 당굿은 하지 않으며, 일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찾아와 빌고 가는 당이었다. 집 제사 때 제사음식을 조금씩 가져와 올리기도 하는데 돼지고기는 올리지 않는다. 

함덕에는 당마다 다양한 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신들의 이름도 다양하다. 함덕의 김영철 심방에 의하면 모든 직장에 업무를 분담하기 위한 전문 분과가 있듯이 당에 좌정한 신들도 마찬가지라 한다. 이 중에서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본향신은 급서황하늘인데, 세월이 변하고 생업의 양상이 달라지면서 찾아가는 단골이 줄어들어 그 세력은 점점 약화 되었다고 한다. 

아이의 치병과 산육을 관장하는 죽도남빌레일뤠한집은 서우봉에 흔적만 남아있고 당됫동산 일뤠한집과 알질우의 요드레한집은 없어졌다. 그리고 함덕역개(신흥) 열세거리 삼천병마는 신흥리 성터 주변 본향당신을 수호하는 군졸신으로 문지기 역할을 담당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제는 그러한 권세와 능력도 희미해졌다.

하지만 서물 할망당은 아직도 찾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함덕이 어촌 마을이고 여전히 물질을 하는 해녀와 배를 부리는 어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사 안녕을 지켜주는 미륵돌인 용궁아기씨는 해녀와 어부들에게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부여잡은 목숨줄이 아닌가.

개조하기 전 서물당 모습. (사진=제주투데이DB) 
개조하기 전 서물당 모습. (사진=제주투데이DB) 

이렇듯 함덕리는 마을이 큰 만큼 신당도 많았다. 이곳에 당이 많은 사연에 대해 강소전 신화연구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함덕리는 제주 4·3 때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선흘, 대흘, 교래, 송당 등 인근 산간 주민들의 주요 피난처가 되었다. 

피난 온 사람들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정착함에 따라, 자신들이 살던 지역에서 모셨던 신들을 이곳에 옮겨와 좌정시킨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서모가지당(선흘). 서모가지당(교래), 서모가지당(송당) 등 글자 그대로 본향에서부터 ‘가지 가른 당’들이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고향은 잠시 떠나 왔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힘겨운 생활은 견디기 위해 혹은 원통하게 죽어간 가족과 친지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자신들만의 당신(堂神)이 절절하게 필요했을 것이었다. 

함덕리 역시 여느 지역 못지않게 제주 4·3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함덕리는 제주 4·3 당시 1개 대대가 함덕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북제주군 동부지역 토벌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함덕리 주민들은 군부대에서 즉결처형되는 희생자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마을 곳곳에서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주민들은 악몽의 나날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함덕해수욕장을 비롯한 주변의 모래밭과 서우봉이 토벌대의 소개 명령으로 중산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도피자 가족들의 학살터였다는 사실이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 뒤에 통한의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은 함덕해수욕장뿐만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제주공항이나 제주항부터 정방폭포, 표선해수욕장, 성산일출봉과 같은 유명 관광지 역시 제주 4·3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홍죽희.

홍죽희.

제주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30여 년을 재직하다 2020년 2월 명예퇴직했다. 대학 시절 마당극 운동단체인 극단<수눌음>에 가입, 외지 자본에 의한 제주의 토지 잠식을 다룬 ‘땅풀이’와 1932년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 해녀 투쟁을 다룬 ‘ᄌᆞᆷ녀풀이’ 등에 출연하면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육지와는 달리 제주의 마당극은 신화를 바탕으로 굿에 의해 전개되는 특징이 있어 자연스럽게 제주의 신화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지금도 틈틈이 신당 기행을 다니고 있다. 독서모임<아랑ᄒᆞ라>와 아코디언 모임<바숨>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인문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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