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남 칼럼] “불의에도 소름끼치도록 비겁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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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남 칼럼] “불의에도 소름끼치도록 비겁한 침묵”
  • 김덕남 주필
  • 승인 2020.11.0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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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녀의 신앙고백, 가톨릭 주교·사제·수도자들에게 날선 비판

오래도록 열심인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선배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어느 수녀의 글이었다. 가톨릭 주교 등 교회지도자들과 사제·수도자들의 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내용이었다.

정의를 외면한 사랑, 처절한 상황을 못 본체하는 목자들, 어느덧 특권층이 되어버린 성직자·사제·수도자, 불의한 정치사회에 단호하게 저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름끼치도록 조용한 종교계를 향해 내지르는 처절한 목소리였다.

행간에 녹아 흐르는 표현은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했고 마디마디 솟아나는 비판은 가시처럼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어제 오늘, 우리가 듣고 보고 느껴왔던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부패상을 뭉뚱그려 보여주는 듯했다.

사실 “한국의 종교는 병에 걸려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종교적 리더십은 세속의 리더십으로 변질되었고 교회의 직위는 명예와 권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타락하고 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그러기에 수녀의 글은 신앙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스스로 쟁여온 비겁함과 자기 합리화에 대한 부끄러운 신앙고백이었다.

같은 교계의 수도자가 교회지도자들에게 뼈 때리는 쓴 소리를 보내는 것은 심상히 넘길 일만은 아닌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부르기에 충분하다.

교회 안의 수도자가 교회지도자들을 보는 시각과 교회 밖 세상에서 교회를 보는 시각을 견주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유(思惟)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글을 읽은 입장에서 볼 때 수녀의 글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만 여길 수도 없었다. 거기에는 교회지도자들의 위선적 행태에 반성을 촉구하고 앞으로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간곡한 신앙적 염원과 호소가 절절히 배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글 쓴 수녀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혹여 확증편향주의자들의 해코지로 글쓴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다.

글쓴이의 정치성향과 이념 지향에 관계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주의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전체 한국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맨얼굴을 수녀의 글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글쓴이의 개인적 시각일 뿐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국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을 손가락질 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주교나 사제·수도자들 중 다수는 ‘겸손의 목도리’를 두르고 교회를 위해, 신앙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최선을 다해 영성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병들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하면서 그들의 정신적 삶을 윤택하게 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끄는 사제·수도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녀의 글 전문을 공유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이로 인해 가톨릭교회 내에서 깨달음의 바람으로 작용 할 수 있기를바라는 마음에서다.

비판의 영역에 속해있는 세속화의 주교·사제·수도자들은 부끄러움을 깨달아 새롭게 일어서고 다른 이들은 이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다면 수녀의 글은 한줄기 빛이 되고 교회를 요동치게 하는 거대한 변화의 회오리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수녀의 글 전문>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을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 귀 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적도 없고, 자기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먹으려고 손 한번 담가본적이라곤 없는 가톨릭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 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보호를 외면하고, 제도 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목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음식, 골프, 성지순례(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문장(紋章)에 쓰인 멋스런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 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 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 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 자식 때문에 속 썩고,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 본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 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생활, 독신생활 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고 합리화하고 회피하고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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