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작가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신화를 통해 상상하는 설촌 역사    

신들은 좌정할 곳을 정하기 위해 상상봉오리 오름 위에서 천기지기를 살피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하며, 바둑을 두어 우선순위를 정하기도 한다. 드디어 신들이 입지(들어설 곳)를 찾아내고 좌정한다는 것은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화적 표현이다. 이러한 설촌 역사가 서홍‧서귀당본풀이에도 나타나고 있다.

고산국이 지산국과 바람웃도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산을 내려와 서홍리에 좌정한다. 문무병은  <제주도 본향당 신앙과 본풀이>(민속원)에서 서홍리는 땅이 기름지고 논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고 지산국과 바람웃도가 차지한 상하서귀는 비교적 건조하다고 했다. 

서홍리가 땅이 기름지고 논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라 하니 경제적으로 풍족했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서홍리의 기득권 세력은 고산국 신화를 통해 도덕적 우위를 내세웠으리라.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화 속에서 바람웃도와 지산국이 쫓겨난 것처럼 상대적으로 척박한 땅으로 밀려나야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서사는 약한 세력이 이미 자리를 잡은 강한 세력에 의해 밀려 주변으로 밀려나는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바람웃도는 쉽사리 좌정할 곳을 찾지 못한다. 좌정처가 마땅하지 않아서 쌀오름으로 웃당팟으로 먹고흘궤로, 신나무상가지로 당집으로 계속 옮겨 다닌다. 바람웃도의 이러한 방황에서 살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설촌조상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바람웃도는 화살을 날렸는데, 문섬 한돌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문섬 북쪽 지금의 서귀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곳은 원래 용궁에서 온 금상부인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바람웃도를 보고는 자신의 세력이 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은 바다만 차지하겠다고 하면서 용궁으로 돌아간다. 바람웃도가 좌정하기까지 우여곡절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서홍‧서귀당본풀이는 서홍리와 동홍리, 그리고 서귀동에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설촌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신화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후 신앙공동체간의 반목과 갈등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당본풀이는 신화시대 이후의 생활사까지 반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신화 속에 반영된 제주의 사회 관습

혼인하자마자 미색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처제를 꾀어내어 야반도주한다는 스토리는 지금 관점에서 보더라도 막장 드라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세 신의 갈등을 ‘사랑의 치정극’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이러한 서사는 단순한 치정극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이 신화는 바람웃도와 지산국의 도주 행각보다는 하루아침에 소박당한 고산국의 아픔과 분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기에 뿡개를 날려 경계 밖으로 불륜의 주인공들을 밀어내고, 대대손손 혼인도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신들의 이러한 갈등과 분노, 대립은 제주의 관습을 반영하는 모티브이다. 고산국의 분노만큼이나 아픔과 고난을 짊어졌던 제주의 여인들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주 신화에는 남신들이 심심찮게 본부인을 소박하고 첩을 얻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심지어는 수렵사회를 대표하는 소천국마저 부인에게 쫓겨난 주제에 정동갈의 딸을 첩으로 삼아 산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후대에 삽입된 화소이겠지만 말이다. 

제주의 또 다른 신화 ‘문전본풀이’에도 처첩갈등이 첨예하게 펼쳐진다. 자식이 일곱이나 되어 무능한 남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했더니 노일제대귀일의 딸에게 빠져 있는 재산 모두 잃고 거지 신세가 된다. 첩인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남편을 찾아온 여산부인을 죽이고 본부인 행세를 하면서 남편의 아들들도 죽이려 한다. 

이렇게 신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처첩간의 갈등은 제주의 관습과 현실을 반영하는 모티브이다. 어쨌든 신화를 읽다보면 남신들이 고기를 먹었느니 말았느니 하면서 부인을 소박하고 첩을 얻곤 한다. 아무리 신화라 할지라도 유쾌하지 않은 전개다. 하지만 주변에서 익히 보아온 풍경이기에 이야기 속에 배어 있는 여인들의 좌절과 아픔에 무심할 수 없는 것이다. 

제주도는 바다에 고기 잡으러 나가거나 부역에 동원되거나 하면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고 이에 따라 실제로 제주는 여자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고광민의 <제주생활사>에 소개된 1904년 ‘삼관호구가간총책’ 기록에 의하면 마을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많았고, 어떤 마을은 여자들의 수가 두 배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 없이 여자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우자가 있는 남자에게라도 시집을 갔던 여자들이 많이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제주 목사로 지내면서 제주의 자연과 풍속에 대하여 기록했던 이형상은 <남환박물>에 “아주 잔약한 사람도 또한 두셋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고, 혹은 십여 명의 아내를 둔 사람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귀본향당과 이중섭 거리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신화 속에 펼쳐졌던 삼각관계의 판도는 변했다. 고산국이 좌정하고 있는 서홍리 본향당은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원래 고산국을 모시는 본향당이 동카름 먹구슬당으로 하나였으나 심방끼리 다툼이 나서 안카름 숭물로 가지갈라 갔다고 한다. 동카름 먹구슬당은 안 간 곳 없이 다니며 사진을 찍는 김일령 선생님도 찾지 못했다고 하고, 안카름 숭물당만 겨우 위치를 알아냈다. 그래서 따로 일정을 잡아 답사를 하게 되었다.

고산국당은 ‘안카름’이란 말처럼 한라산 안쪽으로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당이었다. 당 옆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 하천이 바로 숭물인 모양이다. 그래서 당 이름도 숭물당이고, 다리 이름도 숭물교였다. 절벽 아래 시냇물을 끼고 숲 속에 조용히 자리잡은 안카름 숭물당은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는데, 바로 옆에 큰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이 당의 앞일을 장담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람웃도의 서귀본향당이 있는 서귀동은 오늘날 서귀포시의 중심가로 발전하였다. 게다가 서귀포시에서 바람웃도의 서귀본향당 땅을 매입하고 문화유산으로 정비해놓아 입구에 안내판까지 걸어놓았다. 여러 모로 고산국당과 비교가 된다. 서귀동 신앙민들은 바람웃도와 함께 지산국도 자신들의 신으로 모시고 있다.

서귀본향당은 섶섬과 문섬이 한 눈에 내다보이는 솔동산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옆에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데, 미술관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았더니 문섬이 떠 있는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보였다. 

바람웃도의 서귀본향당이 있는 언덕은 이중섭 거리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와중에 제주에 1년 남짓 거주했던 이중섭 화가를 기념하여 이중섭 미술관을 건립하였고, 이 일대를 이중섭 거리라고 명명한 것이다.

서귀포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언덕배기가 천년 탐라의 풍신 바람웃도의 거리가 아니라 이중섭 거리가 된 현실은 저물어 간 신화시대의 자화상이다. ‘동네 심방 나무랜다.’는 말을 이 대목에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제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행정가들의 낮은 문화의식이 아쉽기만 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서귀본향당을 찾을 때마다 문이 닫혀 있는 건물만 덩그러니 우리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 당집이 이중섭 거리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셈인데, 올 때마다 묵중한 자물쇠로 출입문을 잠가놓고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게다가 시에서 보조금을 받고 지었을 당집은 한 마디로 멋대가리가 없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전에는 마당 앞의 동백도 예뻤고 뒤꼍에도 제법 늠름한 나무들이 있어 그나마 나았었는데 왜 그랬는지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일부러 삭막하게 만들려고 작정을 했나 싶을 정도로 아쉬운 풍경이다. 

아직은 겨울 끝자락인 2월 초에 또 다시 서귀본향당을 찾았는데, 여전히 당집은 문을 자물쇠로 꼭꼭 닫아놓고 있는 것이 유폐된 신의 모습처럼 보여 쓸쓸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바람신을 건물 안에 가두어 놓았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생전에 피운 바람이 그 안에서 곱게 잦아들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동행한 사진작가는 굳게 닫힌 문이 안타까운지 자꾸만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며 번호를 맞혀 보려고 애를 쓰다가 드라이버가 있으면 아예 떼어내 버리고 싶다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간절함이 없었다. 전에 민속학자에게 당집 안의 풍경이 제주식이 아니라 큰 의미가 없다고 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당을 매던 심방의 아들이 육지에서 무속 일을 배워 와서 육지 식으로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서귀본향당에서 나와 옆에 있는 이중섭 미술관 정원을 걸었다. 황량한 서귀본향당과는 딴판으로 어찌나 이렇게 아름답게 정원을 조성해 놓았는지 감탄이 절로 났다. 하얀 매화와 홍매화가 피어 어우러졌고, 그 아래는 유채꽃이 노랗게 물결치는데,  담벼락 아래 고개를 내민 수선화도 진한 향기를 뿜으며 코끝을 간지럽혔다. 

답사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니 이곳 솔동산에 올 때부터 차고 거친 바람을 만났다. 분명 좀 전에 거쳐왔던 하례리도 보목리도 심지어는 바로 옆 동홍리까지도 바람 없이 포근했는데 말이다. 역시나 여긴 바람웃도의 구역인가 보다. 사람들이 그저 바람신을 모시겠는가. 봄을 만났나보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바람웃도 때문에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임을 깨달으며 옷자락을 여미었다.

작가 여연. 

제주와 부산에서 30여 년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퇴직 후에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신화 연구로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다. 생애 첫 작품으로 2016년 <제주의 파랑새>(각 펴냄, 2016)를 출판하였고,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7년 출판산업진흥을 위해 실시한 ‘도깨비 책방’ 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연구소’의 신당 답사를 주도하면서, 답사 내용을 바탕으로 민속학자 문무병과 공저로 <신화와 함께하는 제주 당올레>(알렙 펴냄, 2017)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 연구모임을 1년간 진행하고 2018년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른 책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 펴냄, 2018)를 3권으로 출간하였고 서울과 부산,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제주신화 테마길을 여는 등 제주 신화 스토리텔링 연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