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천둥 번개에 놀라 이리 휘어지고
눈보라 비바람에 쓸려 저리 휘어진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나이테마다 그날의 상처를 촘촘히 새긴
나무 한 그루 여기 심고 싶다
-김수열,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중에서-

사진작가, 기자, 산악인, 작가,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상임공동대표…. 지난 33년간 강정효 작가를 수식했던 타이틀이다. 지난 11월 제주시 애월읍에 자리 잡은 ‘이소재’에서 만난 강씨는 화려한 이력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군살이 없고 인터뷰 내내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던 그의 얼굴은 마치 나무와 닮아있었다.

지난 2009년 2월 지어진 ‘이소재’는 강 작가의 작업 공간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진을 인화하고, 지인을 초대해 술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오랜 시간을 머무는 곳이니 고심 끝에 이름을 지었을 터. 예상과 달리 우연한 사건으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됐다.

“여길 짓고 건물 안에서 새소리가 한참 나는 거야. 살펴보니 가스레인지 후드에 연결된 연통에 참새가 들어와서 둥지를 튼 거였어. 한 달 동안 가스레인지를 못 썼지. 결국 새끼 새가 둥지를 떠나고 나서야 연통을 교체했는데…. 그때 작은 새가 세상으로 나가는 걸 보고 ‘이소(離巢·새끼 새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는 일)’라는 단어가 딱 떠오르더라고.”

또 중국 최초 서사시인 굴원의 ‘이소(離騷)’에서 따와 ‘소란스러움과 이별하는 곳’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진작가답게 ‘ISO(국제표준화기구) 감도’의 뜻을 이 공간에 담기도 했다.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대학 시절부터 카메라를 끼고 다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책가방 대신 카메라만 들고 다녔다. 경제학과를 전공했지만 대학 학보기자로 활동하며 제주시 원도심에 있는 동인미술관에서 개인 첫 사진 전시회 ‘돌하르방’을 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수십 년간 사진을 찍게 된 이유를 물어보자 “전시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내게 고생한다고 술을 사주더라”며 “전시회를 하면 술을 계속 얻어먹겠구나해서 계속하게 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학 졸업 후 1990년 잡지사에 입사, 그 뒤 1992년부터 2007년 5월까지 일간지 '한라일보', '제민일보', 뉴스 통신사 '뉴시스 제주'를 거치며 15년이 넘도록 기자로 활동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제주대학교 언론홍보학과 내 보도사진 과목을 개설해 강의를 다니기도 했다. 그는 이후 2007년 6월에서 같은 해 8월까지 제주 4·3 최대 학살터인 옛 정뜨르 비행장에서 진행된 공동유해발굴단에서 사진 기록을 맡았다.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한라산에 마음을 두다

대학 시절 그랬던 것처럼 기자 생활 내내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성격은 여전했다. 현장에 가장 먼저 가서 보는 사람인 게 좋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뒀던 현장은 한라산. 

“한라산 첫눈이 왔을 때 여섯 번까지 허탕을 친 적이 있어. 사진을 찍으려면 새벽 4시에 집에서 나가야 하거든? 겨울에 날씨가 흐려지고 눈이 올 것 같으면 무작정 올라가서 허탕 치고 내려가고 그렇게 일곱 번 만에 첫눈을 찍은 적도 있었지. 그해 겨울 첫눈이 쌓인 한라산을 바라보는 기분은 참….”

요즘은 한라산 정상에 CCTV가 설치돼 누구든 백록담에 물이 가득 찬 모습이나 눈이 쌓인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엔 수차례 허탕을 쳐야만 누릴 수 있는 감동이었다. 강씨가 찍은 백록담 만수 사진과 눈 덮인 한라산 사진은 전국 일간지 1면에도 실리곤 했다. 한라산국립공원 직원들과도 친해져 퇴근하면서 반찬을 들고 사무소에 갔다가 같이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침 한라산에서 바로 출근하는 일도 흔했다.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한라산 케이블카를 막아내다

10년이 넘도록 ‘한라산 전문기자’로 활동한 강 작가는 한라산의 역사와 환경·생태·지질 구조 등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소개한 <한라산>을 펴내기도 했다. 제주에서 손에 꼽는 ‘한라산 전문가’였던 그는 수십 년간 이어진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논의를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2009년 제주도는 ‘한라산 로프웨이(ropeway·삭도) 설치 타당성 검토 TF’팀을 꾸렸다. 당시 도지사와 도의회가 추천한 인사로만 구성되자 지역사회에서 환경단체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자칫 구색을 갖추는 데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함께 제기됐다. 마침 <한라산>과 <한라산 등반개발사>를 펴낸 강씨에게 나서달라는 요청이 왔다.

“환경단체 측이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쉽지가 않았는데. ‘네가 해라’ 그러더라고. 난 한라산 관련해서 책을 냈으니 관련 데이터는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었지. TF 활동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현지조사를 가는데 한라산 어리목에서 만세동산 가서 경관을 보여주면서 ‘선작지왓에 15미터짜리 건물이 들어서는 거다’라고 말해줬거든. 그러니 다들 기가 막혀 하지.”

TF팀은 그날 하루 만에 반대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분과별 회의와 국내외 사례조사, 현지 조사를 거친 결과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는 경제·환경·사회성 등 모든 측면에서 부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 작가는 한라산 케이블카 사례가 “단 한 번의 집회 없이 논리로 이긴 싸움이라서 보람을 느낀다”며 “다시 케이블카 짓자는 얘기가 나오면 또 똑같이 무조건 이긴다”고 확신했다.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달 15일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강정효 사진작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제주다움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관광개발” 

이후 그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제주대학교 관광개발과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라산 전문가였던 그에게 자연스러운 경력이었다. 강씨는 “관광자원론이라는 교재로 일주일에 3시간을 강의했다”며 “1시간은 교재 얘기를 하고 나머지 2시간은 한라산과 제주 얘기를 했다. 제주에서 대학을 나왔으면 이 정도는 알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고 설명했다. 

제주 섬 곳곳에서 벌어지는 개발사업을 바라보는 관점도 남다르다.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막연한 주장 대신 경제적 가치를 들고 나온다. 

“개발을 주장하는 논리는 주로 ‘지역경제 살리자’인데 관광개발 측면에서 ‘제주다움’을 지키는 게 가장 큰 관광개발이야. 제주도가 10년, 20년 더 나중까지 관광지로 살아남으려면 지금의 제주를 난개발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거지. 1960년대 ‘산악관광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사업이 있었는데 성판악 주차장에서 진달래 대피소까지 포장도로를 내고 백록담 분화구에 호텔을 짓는 계획이 있었어. 그때 그랬으면 지금 한라산의 모습이 어땠겠느냐 말이지.”

그는 제주 자연경관이 갖는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영실의 가치를 따질 때 이용객에게 얼마 정도의 지불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고 이를 수치화하는 것. 이 밖에도 제주 돌담이나 논란이 일고 있는 해상풍력을 두고도 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풍력발전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과 경관 가치를 계산한 금액을 비교해야 한다는 것. 

“만약 지금 유해동물로 지정한 노루를 예로 들자면 노루가 뛰노는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 값이 농작물 피해보다 크다면 농작물 피해를 보상해주면 되는 거지. 이걸 환산하는 기법이 있는데 안 하려고 하는 거야. 비자림로 공사도 이걸 적용하면 교통사고나 정체되는 비용과 경관 가치 간 양쪽의 금액을 계산하잖아? 그럼 그 결과를 가지고 찬성이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좀 더 쉽게 설득할 수 있겠지. 제주지역의 갈등 사례 상당 부분이 이걸로 해소될 수 있어.”

지난달 15일 강정효 사진작가가 제주시 애월읍 '이소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제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선 정체성 고민부터”

강 작가는 또 제주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문화를 비롯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다움’이란 오름과 바다를 지키는 것 외에도 지금까지의 제주인의 삶, 역사, 공동체 문화 등을 모두 지켜내야 비로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16년부터 올 초까지 ㈔제주민예총 이사장과 지난 2017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상임 공동대표를 맡은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지난 몇 년간 과부하가 올 정도로 방대하게 일을 벌였다”는 그는 이제야 쉬는 중이라고 말한다. 1년 가까이 ‘이소재’에서 직접 담근 술을 지인들과 나누며 지냈다. 하지만 평생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기록하던 성격 탓에 최근 사진집을 펴내는 일(?)을 벌였다.

지난 1995년부터 26년간 촬영한 폭낭을 담은 사진 130여점을 모은 <폭낭, 제주의 마을 지킴이>다. 제주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모인 결실이다. 신당(新堂)의 신목(神木)인 폭낭 ‘신목’과 4·3당시 초토화 작전 등으로 잃어버린 마을에 덩그러니 남아 역사를 증언하는 ‘4·3의 기억’, 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었던 댓돌을 함께 담은 ‘댓돌과 폭낭’ 등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사진집 '폭낭, 제주의 마을 지킴이'에 실린 북촌리 당팟. (사진=강정효 작가 제공)
사진집 '폭낭, 제주의 마을 지킴이'에 실린 북촌리 당팟. (사진=강정효 작가 제공)

“제주에서 폭낭은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신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히 마을 공동체와 함께해 온 마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중략). 마을의 중심이자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폭낭이기에 제주 근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4·3의 광풍에서도 비켜나지 못했다. …(중략). 원주민이 살 수 없어 등져야 했던 잃어버린 마을도 최근 들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곳곳에 카페나 펜션, 타운하우스, 전원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까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총칼에 의해 없어진 마을이 요즘에는 자본을 앞세운 개발 바람에 그 모습을 잃어가는 실정이다. 오늘도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폭낭과 주변 집터에 남아있는 대나무만이 그날의 아픔을 조용히 대변할 뿐.”
-강정효, <폭낭, 제주의 마을 지킴이>작가노트 중에서-

130점이 넘는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나무는 표지에 있는 폭낭이다. 이 나무는 그가 매년 벌초를 다닌 조상 묘 근처에 있었다. 4·3을 몰랐던 1980년대 이전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그 나무가 알고 보니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의 나무였다. 4·3을 알고 나서 보게 된 나무는 이전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나무가 됐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사라져 더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앞 밭에 창고라도 하나 해서 갤러리를 낼까 생각하고 있다”며 “사진 작품을 전시하고 항상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제주다움’을 좇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제주를 기록해나갈 것이다. “나이테마다 그날의 상처를 촘촘히 새긴 나무 한 그루”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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