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동갑내기 친구 작가 홍죽희와 여연.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작가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당은 워낙 강하고 센 당이라 앞을 지나는 말들도 꼼짝 못 하고 멈추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말 탄 사람이 말에서 내려 걸어 지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이 당 산신백관은 돼지고기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은 자손은 절대 가지 못하는 당으로 맑디맑은 조상신이라 했다. 그래서 마을 단골들이 돼지고기를 먹어 부정한 몸으로 이 당에서 제사를 지내면 자손의 몸에 부스럼을 준다고 한다. 

최근 들어 이곳 마을주민들이 후세 자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서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해 당의 울타리를 정비하고 당의 유래를 기록한 비를 세워 보존하고 있었다. 이 당은 새당이라 하여 원래 상가리의 본향당으로 부르지만, 예전에는 상가리와 하가리가 한 마을이었다. 따라서 하가리와 상가리 주민 모두가 이 당의 단골들이다. 지금은 매해 정월 초에 택일하여 개별적으로 새벽 시간에 조용히 다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월 초에 이곳에 심방이 상주하면서 복을 빌고 일 년 운세를 점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에서 포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이곳 고내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당에 와서 궤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전한다. 

포제가 끝나면 산신백관과 초립동이, 을서와 병서, 세제동공의 몫으로 3곳에 제물을 싼 지를 묻는다. ‘지’는 쌀이나 향가지, 돈 따위를 백지에 싸서 주먹만 하게 만든 것이다. 유교적인 유습에 의해 많은 본향당들이 파괴되고 훼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포제를 전후해서 본향당을 찾는 것으로 봐서 포제 이전에 당제가 우선이었음을 입증하는 근거이기도 하겠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신의 몸이 되기도 한다. (사진=김일영 작가)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신의 몸이 되기도 한다. (사진=김일영 작가)

바닷가 마을의 해신미륵은 기이한 모양의 미륵돌을 가져와 마을수호신으로 모시는 신이다. 그런데, 이곳 하가리 고내봉에 좌정하고 있는 한라산 산신미륵은 오름에 있는 거대한 바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은 땅에 내려오면 크고 우뚝하게 보이는 선돌이나 미륵바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상상 속의 산신이 지상에 내려와 인간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산이나 오름의 기이한 바위는 옛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자식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이를 낳게 해주는 신으로,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어둠 속에 보이는 한 가닥 희망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산신미륵 앞에서 천연두나 홍역 대신 요즘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하루빨리 물러가기를 함께 기원했다. 그러면서 예전 사람들은 이러한 전염병들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렇게 거대한 미륵신을 모셔놓고 기도를 올렸을까 하는 당시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진작가는 제주 여행을 예약했던 사람들이 줄줄이 취소를 하는 바람에 운영난을 겪고 있어 그런지 자꾸만 한숨을 내쉬며 근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 경제위축에 따른 생계에 대한 불안, 급작스러운 사회적 단절로 겪는 심리적 고통 등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요즘이다. 이렇게 코로나가 온 나라를 어수선하게 하는 이 시기에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이 가진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당의 내부 모습. 나무 위에 지전과 물색, 그리고 명주실이 걸려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당의 내부 모습. 나무 위에 지전과 물색, 그리고 명주실이 걸려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옛날에는 역병에 걸리면 역신(疫神)이 사람의 몸을 범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주술이나 기도에 의지하여 극복하고자 했으며, 역병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별한 의약품이 없던 시절이라 유행의 범위도 엄청난 것이어서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천연두는 이름도 다양하여 ‘손님’, ‘마마’, ‘마누라’, ‘역신’ 등으로 불려왔다. 

<총, 균, 쇠>의 저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도 가장 오랜 기간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사를 극적으로 변화시킨 질병은 다름 아닌 천연두라고 말한다. 총칼에 의해 전쟁터에서 사망한 사람보다 외래에서 건너온 병원균에 의한 죽음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먼 옛날 제주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고 원했던 것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질병 없이 편하게 사는 무병과 장수의 삶이었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천연두나 홍역은 예방주사를 맞고 병원 치료를 통해 완치되는 병이지만, 예전에는 가장 무섭다는 전염병들이었다. 

그러니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일은 아니었다. 전염병이 완치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너무나도 드물고 힘겨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마땅한 병원도 없었을 뿐더러 의료수준도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첫돌을 넘기기 전에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죽했으면 ‘열 낳아 다섯 건지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을까. 우리네 제주 사람들에 있어서 산육과 치병은 평생을 좌우할 정도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당을 찾아 아기 출산과 건강을 위해 비념을 하였다. 이렇게 삼승할망을 일상적으로 찾는 일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자녀가 태어나면 첫돌이 돌아올 때까지는 그 목숨을 부모가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산육을 관장하는 삼승할망의 몫이라는 관념이 일반화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당의 미륵돌 위에는 덩굴식물이 머리 장식처럼 자라고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큰신머들 새당 하르방당의 미륵돌 위에는 덩굴식물이 머리 장식처럼 자라고 있다.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에는 ‘할망본풀이’가 있는데 삼승할망, 구삼승할망, 마누라신(마마신)이 등장한다. ‘삼승할망’은 생불신(生佛神)으로 아이의 잉태, 출산, 성장 과정에 이르는 일을 맡는데 마을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있어 가장 우위로 모시는 신이다. 

‘구삼승할망’은 삼승할망과 꽃 가꾸기 대결에서 밀려나 옥황상제로부터 저승을 관장하는 할망으로 임명된 신인데, 아이들에게 온갖 병을 주어 몹쓸 병에 걸리거나 죽게 하는 저승신이다. 반면에 마음이 깊고 넓은 삼승할망은 구삼승할망을 잘 달래고 설득하여 아이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하는 방법을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지혜를 발휘한다.

그리고 ‘서신국마누라’는 천연두, 홍역 등 무서운 역병을 주는 신이다. 인간이 살면서 한번은 만나게 되는 신으로 얼굴에 마마 자국을 남긴다. 그는 남성신으로 권력과 힘을 상징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지만, 결국 아기의 탄생을 관장하는 삼승할망의 덕망과 위용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얼마 전에 제주도의 ‘민요패 소리왓’의 삼승할망 관련 공연을 흥미롭게 구경한 적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에는 아픈 곳이 너무도 많아, 세상이 변하고 변할수록 우리네 신들은 할 일이 너무나 많다.’라는 주제로 제주신화 속 삼승할망과 서산국마누라의 대결 양상을 제주의 전통 민요와 창작 민요를 잘 버무려 창작한 소리굿 공연이었다.
     
당을 나오면서 한라산 산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 마을로 왔을까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어졌다. 여러 얘기가 오간 끝에 사냥이나 채집 시기엔 산신의 기세가 워낙 컸지만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바야흐로 농업신이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되고 상대적으로 산신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산신들이 좌정할 곳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끝내는 수수범벅이라는 거친 음식이라도 먹고 싶어 초립동이 손에 이끌려 마을까지 들어왔다. 신앙민들이 더 이상 산신을 찾지 않으니 오히려 산신이 신앙민을 찾아 내려왔던 것이리라. 그러니 고내봉에 좌정한 산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렵 사회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당에는 산신 외에 다른 신들도 함께 좌정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외부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였던 섬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제주시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동부 지역에 비해 유교와 같은 외래문화를 더 풍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부 지역은 무속 신앙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반면에 서쪽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납읍은 지금도 금산공원에서 포제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지만 토속 신앙인 신당은 거의 존재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홍죽희.

홍죽희.

제주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30여 년을 재직하다 2020년 2월 명예퇴직했다. 대학 시절 마당극 운동단체인 극단<수눌음>에 가입, 외지 자본에 의한 제주의 토지 잠식을 다룬 ‘땅풀이’와 1932년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 해녀 투쟁을 다룬 ‘ᄌᆞᆷ녀풀이’ 등에 출연하면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육지와는 달리 제주의 마당극은 신화를 바탕으로 굿에 의해 전개되는 특징이 있어 자연스럽게 제주의 신화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지금도 틈틈이 신당 기행을 다니고 있다. 독서모임<아랑ᄒᆞ라>와 아코디언 모임<바숨>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인문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