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아기의 웃음은 티 없이 맑고 밝았다. 갓 피어난 꽃처럼 싱싱하고 예뻤다. 해맑은 눈웃음에서 이 세상의 어떤 더러움도, 어떠한 욕심과 무서움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순수, 그 자체’의 아우라가 피어났다.

아장아장 뒤뚱 거리는 오리걸음이 눈에 선했고 까르르 새 하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렇게 여리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어느 아기인들 그렇지 않으랴. ‘어린이’란 말을 처음 만들었고 ‘어린이 날’을 창시했던 방정환(1899~1931)선생도 ‘고요하고 평화롭고, 더 할 수 없는 착함과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었다’고 잠자는 아기의 모습을 그렸었다. ‘어린이 예찬’에서다.

이러한 아기가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태어나 고작 열여섯 달 만에 악마 같은 양모(養母)의 가혹한 폭행으로 죽은 ‘정인이’ 이야기다.

최근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진 ‘정인이’의 비참한 최후는 온 국민에게 충격을 줬다. “세상에 이럴 수 있느냐”는 경악과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정인이’는 2019년 6월에 태어났다. 아동보호 복지 시설에 있다가 생후 7개월 무렵인 작년(2020년) 1월에 문제의 양부모에게 입양됐다.

그런데 입양 후 열 달 동안 지속적으로 학대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모는 “말을 듣지 않는다”, “밥을 먹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지속적인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결국 2020년 10월 13일 사망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던 것이다.

국립과학 수사원의 부검결과 췌장 절단 및 후두부와 쇄골, 대퇴골 등 골절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CT 영상을 분석했던 의료진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뱃속은 출혈로 인해 복강 전체가 피로 가득했고 터진 장에서 빠져나온 공기가 복근에 차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장기 일부에서 최소 일주일 이전에 충격을 받아 장기가 손상 되었고 양팔과 가슴에만 10군데 골절 흔적이 있었다고 했다.

가해자인 양모는 “약하게 몇 대 때렸을 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의들은 “그 정도 폭행으로 장기 절단 및 후두부와 쇄골 등이 골절 되는 것은 불가능 하며 정상적인 양육을 받는 아이에게서는 절대로 나타날 수 없는 골절 소견”이라고 진단했다.

한 전문의는 ‘정인이’의 상태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분노를 느꼈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 어리고 여린 아기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양모는 ‘정인이’의 사망 판정을 받은 병원에서 "우리 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하냐“며 서럽게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악어의 눈물’을 목격한 한 의사는 “정말 천사의 탈을 쓴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인이’의 비참한 죽음은 세상의 위선과 악에 대한 고발일 수도 있다. 어른들의 탐욕과 이기심과 악마 근성,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이 빚어낸 사회악인 것이다.

순수한 입양 문화는 더불어 사는 사회의 아름다운 현상이다.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돌보고 키우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남의 아이를 거두어 제 자식처럼 키우는 것은 웬만한 사랑과 희생과 인류애가 없으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입양 부모들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 사랑으로 거두어 키운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처럼 표현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녹록치가 않는 것이 ‘입양 문화’다. 그만큼 입양가정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제도적 지원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이번 ‘정인이’ 사건은 순수성이 결여되고 인성이 마비된 양모의 이기심과 욕심이 만들어낸 반인륜적 패륜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양모는 ‘정인이’ 입양 후 입양 축하금과 입양 아동 수당 등을 꼬박꼬박 챙겨 왔다고 했다. 그리고 주위에 입양사실을 자랑하며 다녔다고도 했다.

모 방송 TV에 출연해서는 “입양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축복받을 일”이라며 입양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말도 있다.

겉으로는 그렇게 위선을 떨면서 뒤에서는 ‘정인이’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가하고 죽게 만든 악행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앞과 뒤가 다른 ‘야누스의 얼굴’이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악마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번 양모의 철면피한 악행은 선의에 의해 순수하게 입양을 해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는 많은 입양 부모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모든 입양가족에게 잠재적으로 아동을 학대할 수 있다는 낙인으로 작용해서는 곤란하다.

‘정인이 사건’은 아동학대의 문제이지. 입양 가정의 문제로 덮어씌워서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의 ‘2019 아동학대 주요 통계’를 보면 2018년에서 2019년 사이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사건은 모두 70건으로 집계됐다. 이중 입양 가정에서 숨진 아동은 단 1명 뿐 이었다.

‘정인이 사건’을 아동학대의 문제이지 입양가정의 문제로 덮어씌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혈연 중심사회인 한국에서 이런 이유 등으로 입양문화가 위축되거나 배척기피된다면 그 피해는 부모를 잃은 불쌍한 아이들에게 돌아 갈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정인이 사건’에서는 경찰 등 아동학대 예방과 대책에 책임을 갖고 임해야 할 관련 부서의 무책임과 무관심이 노출됐다.

“아이가 죽어간다”는 세 번의 신고를 받고도 제때에, 그리고 관심을 갖고 손을 쓰지 못한 것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안전망이 촘촘하게 짜여 져서 작동됐었더라면 ‘정인이’의 처참하고 불쌍한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이른바 ‘정인이 법’으로 불리는 ‘아동학대 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 됐다.

‘지자체나 수사 기관이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로부터 신고를 받으면 즉각 조사나 수사 착수’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법이 만능일 수는 없다. 아동학대 문제에 관한 한 필요한 것은 사회적 관심과 아동에 대한 부모의 참사랑이다.

그러한 사랑과 관심이 강물처럼 사회에 넘쳐흐를 때라야 ‘세상에 태어나 겨우 열다섯 달 살다간 아기, 그 짧은 생애에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로부터 가혹하게 죽임을 당한 ’정인이의 어린 넋'이 그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별이 되어 빤짝이는 슬픈 ‘정인이의 넋’을 위로하는 것은 살아있는 어른들의 무한 반성과 무한 책임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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