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군기지는 강정마을 공동체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을 시작한 지 어느새 5000일이 되어간다. 흘러간 많은 날들 만큼,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한 투쟁에 각각의 방식으로 함께 했다. 오는 23일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 5000일을 맞아 강정평화네트워크는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에 참여해온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를 모았다. 이들의 목소리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 주>

 

김정임 송악산개발반대대책위원장(사진=김재훈 기자)
김정임 송악산개발반대대책위원장(사진=김재훈 기자)

김정임

힘 없는 백성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강정투쟁 5000일!!! 기록적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분들께 깊은 마음으로 숙연해질 뿐이다. 해군기지는 건설되었지만 주민들이 요구하는 진정성 있는 국가의 대답은 오늘도 메아리로 허공에 남을 뿐인가?

올해 신년 특별 사면자 3000명에서 해군기지 반대 주민은 18명! 강동균 회장은 생색내기 특별사면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국책사업이란 허울로 강행한 해군기지는 주민들이 우려했던 대로 군사보호지역이 되었고 민군 복합항으로 관광과 함께 가겠다던 정부의 약속은 어떠한가? 공사 시작하기 전에 유혹하던 온갖 빛 좋은 개살구는 어디로 갔는가?

갈등으로 인한 치유와 공동체의 회복은커녕 더욱 분노와 골 깊은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부정의한 국가사업에 평화롭게 살아가는 주민들은 얼마만큼 당하며 살아야 하는가? 제주 역사상 10년이 넘도록 자발적이고도 전국적인 연대의 힘으로 투쟁을 한 것도 강정이 유일하다. 투쟁의 중심에는 군사기지는 절대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가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지키려는 절절한 백성과 국가를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힘없는 백성은 늘 국가의 위력 앞에 좌절하고 만다. 현재 제주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업들 또한 마찬 가지다. 국가는 백성을 지켜야 하는데 백성이 없다. 그 힘없는 인민이 뭉쳐 싸우고 있다. 작은 그 힘이 나를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고 국가를 지킬 것이다.

명백한 이유로 강정 투쟁은 계속 되고 있다. 단결된 민중의 힘은 패배하지 않는다. 나는 믿는다. 우리는...

 

(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문해람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 과정 재학생(고3).(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문해람

강정을 통해 세상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지다.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강정 투쟁을 접했지만 직접 강정마을에 방문한 것은 작년이 처음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해군기지 앞에서 백배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내게 아뿔사! 하는 느낌을 주기도 했던 백배는 남을 위해서 할 수도 있으나 결국 나의 마음을 돌아보게 했다. 한 절 한 절을 올리며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고 현재의 내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매일 진행되는 천막 미사와 인간 띠잇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기에 그 처음의 다짐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강정을 지키고자 하는 그 평화 바람은 5000일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니 더 단단해진 듯싶다. 나는 매일 아침 올리는 백배를 통해 그 바람이 여전히 거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정 투쟁을 이어오며 때로는 과격하게 맞서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고 잠시 쉬어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5000일 동안 강정 투쟁은 일상 속에서 ‘멈춘 적’이 없다. 매일 매일이 투쟁이었으며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강정은 여전히 투쟁 중이며 불복종하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투쟁에 연대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의 일임을 알고 함께 해야 할 투쟁임을 알았다.

그래서 강정 투쟁을 달리 말하면 평화를 위한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정 활동가 중 한 분은 ‘우리는 먼저 온 미래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강정에서 벌어지는, 더 크게 제주에서 일어나는 난개발과 군사기지화는 절대 강정과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를 덮칠, 아니 이미 도래한 지구적인 문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정 투쟁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외면할 수 없다. 강정 투쟁은 나와 우리(인간, 자연) 모두의 공존을 위한 투쟁이니까 말이다. 여기 강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다시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바란다. ‘있는 그대로’ 강정마을을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생명 자체를, 그 존엄함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더 많아진다면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라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강정 5000일 투쟁을 통해 배우고 있다. 그렇게 강정 투쟁이 우리 모두의 투쟁이 되는 그날이 벌써 그립다.

 

최성희씨(사진=김재훈 기자)
최성희. 강정국제팀 활동가. 강정영자신문 발행에 참여하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최성희

지난 약 13년간 강정의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에서 기억되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수많은 국제 활동가들의 방문과 연대이다. 그들은 이 한반도 남단의 섬에 와 몇 시간, 몇 일, 몇 달, 때로는 10년 가까이 머물며 우리의 제주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함께 해왔다. 그들 중에는 비폭력직접평화행동으로 세 번의 체포 끝에 강제 출국 명령을 받은 프랑스 시민 벤자민과 출국 명령을 받은 영국의 노벨평화상 후보 앤지 젤터가 있다. 각각 구럼비 발파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2012년 3월 14일 그리고 그 다음 날의 일이다. 그런데 벤자민이 강제로 비행기에 호송되던 그 날 아침 세 명의 미 평화재향군인회 회원들이 입국 거부되었다.

이들 포함 강정의 제주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연대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입국 거부된 국제 활동가들은 20여명이 넘는다. 대다수가 오키나와와 일본의 평화활동가들로서 그 둘 중에는 두 번에 걸쳐 입국 거부된 이들도 있다. 병든 노모를 끝내 못 보고 돌아가야 했거나 암을 무릅쓰고 왔음에도 발길을 돌려야 했던 재미교포들이 있다. 대만에서 온 활동가는 2014년 입국 거부로 1년 가까이 힘든 시간을 보내다 입국 해제 이후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국제활동가들 중에는 폭력적인 입국 거부 과정으로 정신적 충격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국제활동가들은 공사업자들의 직접적인 폭력을 당하거나 때로는 생명을 무릅써야 했으며 비자 연장에서 협박과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2012년 2월, 10여명의 국제활동가가 체포된 일도 빠질 수 없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국제활동가들은 지금도 우리와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도 아닌 곳의 평화를 위해 왜 자신의 열정을 바치는가? 앤지 젤터는 떠나기 전 강정에 지구가 그려진 깃발을 남겼다. 나는 국제활동가들을 생각할 때마다 숭고한 사랑을 떠올린다. 나는, 당신은 그들처럼 할 수 있는가?

(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송창욱. 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송창욱

강정 투쟁에 있어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거의 모두 구럼비 위에서의 추억들이네요.

가장 처음은 평화지킴이밴드 신짜꽃밴 100일 기념 콘서트를 구럼비에서 했던 순간일 겁니다.

2011년 9월 4일 구럼비를 둘러싼 펜스가 쳐지고, 구럼비는 우리에게 늘 그리워하면서도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짜꽃밴이 우리 팬클럽 이녁밖에 없주게 멤버들을 2012년 2월 6일 아침에 소집하더니, 느닷없이 구럼비로 침투를 감행했죠. 미리 며칠간 신짜꽃밴 멤버들이 사전 답사를 통해서 펜스 밑으로 개구멍을 파 놨던 겁니다. 펜스가 쳐진 후, 송강호 박사님과 동원이 수영으로 구럼비에서 기도하가 나오기는 했어도, 육상으로 대규모 침투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얼떨결에 따라가면서도, 긴장과 설레임에 몸이 떨렸던 기억이 납니다.

5개월 만에 만난 구럼비 위에서 우리는 현수막 펼쳐 들고, 신나는 난장을 한바탕 펼쳤죠. 결국 서귀포경찰서로 전원 연행되어서도, 우리는 구럼비를 다시 만난 기쁨과 벅참에 낄낄대며 이야기꽃을 피웠었죠. 체포 후 경찰서에 연행되어서도 그렇게 즐거워 한 사람들은 아마 우리뿐이었을 겁니다.

그 이후로는 육상 침투는 못 하고, 거의 카약을 이용한 해상 침투, 혹은 철조망을 우회한 수영으로 구럼비로 갔었어요. 그저 구럼비로 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듯, 구럼비로만 구럼비로만 갔어요. 제 인생에 가장 감동적인 미사였던 구럼비 일출 미사를 제외하고는, 구럼비를 나올 때마다 항상 경찰에 체포되어서 유치장으로 갔었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나 행복했어요.

문정현 신부님과 강정 주민들, 그리고 활동가 친구들.. 그리고 내 사랑 구럼비..

지금도 저는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믿고, 구럼비를 되찾을 날을 꿈꾸며 살고 있답니다.

 

굿 퍼포먼스 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한진오.(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극작가.(사진=김재훈 기자)

한진오

2007년부터 해군기지가 들어서던 해까지, 그리고 현재까지 내가 바라보고 겪었던 강정의 모든 것이 가슴에 남는다. 굳이 인상적이었던 순간을 기억해내라면 어느 해인지 정확한 년도는 기억나지 않으나 당시 마을회장이었던 강동균 회장님께서 목에 쇠사슬을 묶고 경찰과 대치해 긴 시간 동안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던 순간이었다. 결국 강동균 회장님이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차를 에워쌌고 강동균 회장의 부인께서 송양화 서귀포경찰서장을 겨냥해 온몸으로 저항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예술가인 개인적 입장으로서는 강정의 참상을 고발하는 연극의 극본을 썼던 것도 가슴에 남는다. 모노드라마 이녁은 예술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졌는지 모르나 당시로선 강정을 알리고 연대하는 계기로 삼자던 열망은 무엇보다 뜨거웠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십년을 훌쩍 넘긴 강정투쟁에 나는 한 발은 걸치고 한 발은 뺀 상태에서 주저하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을 핑계 삼아 적극적인 활동에 임하지 못했던 것이 가슴께에 맺힌 멍울처럼 자책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렬한 싸움은 못할지라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연대의식이 깊게 다져졌다. 용감하지는 못해도 비겁하지는 말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니까.

5000일이란 숫자로 모든 기억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5000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중요한 것은 시간을 카운트하며 언제부터 언제까지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오늘까지 지난한 투쟁을 이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정주민들과 지킴이, 그리고 수많은 평화운동가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누구에게나 강정의 미래는 공통적이지 않을까? 김경훈 시인의 시 ‘백지화되는 그날’의 한 구절로 대신하고 싶다.

강정마을 지키세

마약댄스가

거대한 군무로 이어지니

너 나 없이 얼싸안아

축하의 노래 일렁이리라.

범섬도 일어나 궁둥이 들썩이고

기쁨의 눈물로 하염없이

강정천은 흐르리라.

그날은 이제 곧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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