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묵은 응어리 이제야 푼 101세 할머니
상태바
평생 묵은 응어리 이제야 푼 101세 할머니
  • 박소희 기자
  • 승인 2021.01.21 1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지법, 제주 4·3 행방불명 희생자 재심서 첫 무죄 선고
재판부 "극심한 이념대립이 부른 무고한 희생이었다"
(사진=박소희 기자)
(사진=박소희 기자)

행방불명된 4·3 수형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에 유족들이 눈물을 훔치며 만세를 외쳤다. 

21일 오전 11시 경 제주지법 201호 법정 앞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故) 오형률씨 등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 행방불명된 10명에 대한 내란죄 및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에 대한 결심 공판이 있어서다. 

11시30분. 재판 시작에 앞서 유족 및 관계자들이 천천히 재판장으로 들어왔다. 이들 가운데는 몇몇은 걸음을 옮기기 힘들어 부축을 받고 입장하기도 했다. 금세 방청석은 어르신들로 꽉 찼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검찰측이 “이들의 죄를 입증할 자료가 전혀 없다”며 무죄를 구형하자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피고인들의 생사여부도 확인하지 못한 채 70여년을 버틴 재심청구인들의 고통이 이번 재판을 통해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바란다."고 덧붙였을 땐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이날 결심공판에서 이례적인 선고까지 내렸다. 보통 결심공판에서는 구형만 이뤄지고 추후 선고를 확정하지만 재판부는 재심청구자가 고령이고 공소 내용에 다툴 여지가 없다는 점을 들어 구형 즉시 선고를 진행했다. 

이날 재판부는 “국가로서 완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 시기에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피고인들의 목숨은 희생됐고, 가족들은 고통을 겪었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몇 번을 곱씹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면서 “이번 판결로 피고인들과 유족들이 저승에서라도 좌우를 따지지 않고 마음 편하게 한 밥상에 앉아 정을 나누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판사의 목소리가 방청석까지 잘 들리지 않아 어르신들은 옆사람에게 연거푸 선고 내용을 묻기도 했다.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행방불명 희생자는 故김경행  故김원갑 故문희직 故서용호 故양두창 故오형률 故이기하 故이학수 故전종식 故진창효 이상 10명이다. 

(사진=박소희 기자)
故오형률씨 아내 현경아씨와 딸 오정희 씨 (사진=박소희 기자)

재판을 마치고 나온 재심청구자 8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만세를 외쳤다. 

故오형률씨 아내 현경아(101세)씨는 "70년동안 가슴에 응어리가 졌었는데 오늘 이렇게 불명예를 씻어줘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당신) 불명예 씻고 왔다. 남편 만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며 힘들게 말을 이었다. 

(사진=박소희 기자)
故서용호 씨 동생 서영진 씨. (사진=박소희 기자)

이어 故서용호 씨 동생 서영진(87세)씨는 “70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유족에게는 연좌제 때문에 자식들 하나도 공직생활을 못했다. 그럼에도 무죄 결정 내려줘서 고맙다”며 “앞으로 제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故김경행 씨 딸 김을생(87세)씨는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풀렸다”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하염없이 읊자 “밤 새겠다”는 주변 만류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한편 이날 검찰의 구형대로 선고가 이뤄진 만큼 재판 역시 항소 없이 선고가 확정될 것으로 보이며 향후 330여명의 4.3 행방불명 수형인 대한 재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