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귀환-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br>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br>
《마르크스의 귀환-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필요한 책을 찾아 인터넷 서점을 뒤적이던 중 만난 책이다. 마르크스의 삶을 소설로 엮었다고 한다. 지난해 7월에 나왔다. 우리 시대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슬라보예 지젝의  “마르크스의 혁명 사상 핵심에 가닿은 걸출한 소설”이라는 한 줄 평도 곁들여져 있다. ‘장바구니’에 넣을까, 하고 있는데, 댓글 하나!

“마르크스가 쓴 게 <자본>인지 <치질>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소설. 치질, 체스, 기차 환상으로 소설의 상당 부분은 소비되고, 정작 그의 명망 높은 저서는 어쩌다 뒷걸음질로 탄생한 인상만 남긴다. 4페이지면 족할 사적인 일화를 400페이지 넘게 늘려 변죽만 건드리다 북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이만하면 악평 중의 악평이다. 세계사 혹은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로 꼽히는 마르크스를 고작 사소한 에피소드 몇 개에 의지해 설명하고자 한다는 힐난. 하지만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비판과 비난이 다르듯 악평과 악성 댓글(악플)은 다르다는 사실. 작가가 자신의 방식대로 한 편의 소설을 썼다면, 독자 또한 독자만의 방식으로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내용이 독하다고 댓글을 탓할 일은 아니다. 

지금 이곳에서 마르크스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언제적 마르크스냐!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사상(가)에 대해 정색해서 덤빌 필요 없다”는 식의 마르크스 부정론. 둘째는 “세상에 억압이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는 언제나 살아있다”는 식의 마르크스 부활론. 물론 이 둘을 뭉뚱그려 놓은 대답도 있으리라. 가령 이렇게.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이곳에 적합하다고 그 이론이 시대를 뛰어넘어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 오늘의 이론도 어제의 이론일 뿐이다. 이론도 시대의 산물이며, 사람처럼 생로병사를 겪는다. 그러니 애써 언제까지 마르크스를 추모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벤야민이, 또 누군가에게는 지젝이 또다른 마르크스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 괴테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영원히 푸르른 것은 생명의 나무다”라고. 그러니 이제는 그의 삶에서 시대의 희망과 지혜를 찾자! 

이렇게 넘어가면 될까? 이제 소설 마르크스를 읽으면 될까? 아니다. 댓글은 나를 향해 중요한 무언가를 묻는다. 과연 너의 마르크스는 어디에 무엇으로 있는가? 이 질문은 몹시 아프다. 마치 여태껏, 그리고 앞으로도 기껏 변죽만 울릴 그 어떤 삶에 대한 힐난!

국내 최초로 <자본>을 완역해 출판한 출판사 <이론과 실천>의 대표 김태경 선생. 그와 관련한 전해지는 에피소드는 그 대답의 하나다. 시쳇말로 하면 ‘레전드 썰’이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Marx가 칼-막스, 칼 맑스, 카를 마르크스 등으로 제각각이었던 시절, 그 셋 모두가 고유명사도 표준어도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굵고 짙게 빨간 줄 그어진 금기어였을 때다. <자본>을 펴내면 국가보안법 위반 등등의 혐의로 구속되리라는 게 뻔히 짐작되는 일이라서 김 대표는 미리 도망을 쳤는데, 그가 잡힌 곳은 다름아닌 어느 지방의 유명한 맛집이었다고 한다. 김 대표의 ‘참을 수 없는(?)’ 미식 취향을 알고 형사들이 맛집에 미리 잠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태경의 마르크스'는, 말해져야 될 것은 마땅히 말해져야 되고 즐겨야 될 것 또한 마땅히 즐겨야 한다는 당위(當爲)의 과정이자 결과물이 아닐런지.  

 마지막 문장을 썼다 지운다. 차마 부끄럽고 참담해서. 컴퓨터를 닫는다. 안녕, 마르크스!

다시 내게로 돌아와 묻는다. 정녕 내 삶의 페이지에서 마르크스가, 문학적 상징의 이름으로라도, 과연 4페이지나 될까? ‘시대의 우울’과 청춘의 ‘질풍노도’? 지식의 ‘향연’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에 미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를 밑줄 그으며 읽고 싶지는 않다. 왜? 나의 세상은 충분히 이미 안온하니까! 밖의 세계는 썩었어도 내 안의 세계는 살만하다고 여기니까! “당신의 마르크스는 어디에 있나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썼다 지운다. 차마 부끄럽고 참담해서. 컴퓨터를 닫는다. 안녕, 마르크스!

-글에 인용된 김태경 대표의 에피소드는 오래 전 기억나지 않는 그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실관계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선생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세상으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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