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난퓨전]옥삼근갱(玉糝根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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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퓨전]옥삼근갱(玉糝根羹)
  • 김은영
  • 승인 2021.01.22 18:50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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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단순한 맛의 음식은 사람의 주의를 끌어 음미를 하게 한다. 음미할 수 없다면 이미 미각이 둔화되었거나 혀를 너무 혹사시키진 않았는지 돌아보시길! 

김은영 요리연구가(가운데).(사진=김은영 제공)
김은영 요리연구가(가운데).(사진=김은영 제공)

 

우리는 현재에 산다. 그렇지만 현재는 과거에서 발원되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며, 결국 미래를 향했고 시간이 멈추어진 적이 없다. 끝없는 현재이다, 잊혀가는 일만 가능한. 그 흐름 속에서 음식도 그렇다. 2018년 가을 뉴욕에 있는 자연주의 요리학교에 공부하러 간 적이 있다. 음식과 맛이라는 건 뚜껑이 열린 끓는 냄비 속으로 들어간 민족, 침략, 이민, 전쟁, 계급, 기아, 세금, 종교, 빈부격차, 기후 문제 같은 양념들이 역사의 부침에 따라 가감되어 조리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냄비 안에서는 늘 퓨전이 일어난다. 음식도 시간(역사)흐름 위에 얹혀가는 동시에 늘 퓨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음식에는 어떤 융합들이 있어왔을까? 극동의 나라들은 서로 음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제주의 전통음식은 어느 시대부터 먹어 온 것일까? 바깥에 나갔다가 도리어 우리 것에 대한 숙제가 생겨서 돌아왔다. 

‘잊어버린 현재의 것’들을 통해 현재 음식의 지평을 넓혀 보는 것이 의미 있겠다고 생각이 든 것은 최근 출간된 서유구 선생의 <임원16지> 중 ‘정조지’에 수록된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맛을 보면서부터다. 정조지에 기록된 음식을 매회 두어 가지 정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오래된 것이지만 잊혀진 것이므로 새것이 되는 오래된 미래의 맛을 통해 말이다!

이번에 소개하고픈 재료는 제주의 대표적 겨울작물인 무와 당근. 중앙아시아와 지중해가 원산지인 무와 아프가니스탄이 원산지인 당근은 언제부터 제주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을까? 

(사진=김은영)
당근. (사진=김은영 제공)

제주도는 제주라는 이름 이전에 독립된 탐라왕국이었다. 탐라국 시기의 제주는 지리적인 원인으로 일본, 남중국, 한반도의 삼국과 모두 문화적으로 교류하고 있었는데 주로 어로와 수렵을 하던 탐라의 정지(부엌) 솥단지 안에는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어떤 퓨전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언어적으로는 주로 한반도 영향권 언어를 썼다지만 탐라인 스스로 남긴 문헌이 극히 없는 까닭에 사료를 통해 유추하면 제주 음식 발달의 특징은 크게 불교문화의 도입이 가져온 채식 문화, 삼별초가 들여왔을 서울의 식문화, 100년에 이르는 원의 통치 시기의 북방 식문화 유입, 세 가지로 분류가 될 것 같다. 

전국 생산량의 70%에 이르는 제주의 당근. 13세기에 아프카니스탄 지역에서 중국으로, 16세기에는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제주에는 1960년대에야 들어와 재배됐다. 제주 음식이 완성된 20세기 초반 이후의 일이므로 제주 전통음식의 재료로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조선 시대 ‘정조지’의 기록에는 매력적인 당근요리 ‘호라복제’와 ‘호라 복자’ 조리법이 들어 있다. 아주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맛이다. 

옥삼근갱. (사진=김은영)
옥삼근갱. (사진=김은영 제공)

반면 무가 한반도에 들어 온 것은 삼국시대였다. 고려 시대 한반도의 중요 채소로 자리 잡았고 제주에도 탐라국 형성기인 삼국 후기부터 무가 재배돼 메밀과의 조리법 등 주요 부식 재료로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1930년대까지 재배된 무는 재래종으로 지금의 무와는 다른 맛일 테지만 겨울의 제주무는 시원하고 달큼한 맛이 일품이다. 

‘옥삼근갱’은 아무 첨가물이 없이 그 무맛의 진수를 먹는 음식이다. 재료의 맛으로 충분해 양념이 필요 없는 음식. 이런 극도로 단순한 맛의 음식은 사람의 주의를 끌어 음미를 하게 한다. 음미할 수 없다면 이미 미각이 둔화되었거나 혀를 너무 혹사시키진 않았는지 돌아보시길! 

이런 맛의 작용을 두고 명상을 불러오는 맛의 시간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소금도 그 순수한 맛에 방해가 된다. 첨가한다면 단조로움을 깨고 맛을 한 겹 더해 줄 후추를 살짝! 무를 막 다져도 되겠지만 아주 곱게, 같은 크기로 사각사각 썰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을 맑은 물만 넣어 무의 즙이 푹 우러나도록 삶는다. 거기에 불려둔 멥쌀의 쌀알이 부서지게 우르르 갈아주고 끓고 있는 무즙에 넣어 수프처럼 끓인다. 소박한 그릇에 담더라도 투명한 무의 색과 맛과 향을 온전히 음미해보시길! 

제주 사람들이 콩가루를 풀어서 먹는 겨울 무콩국도 참 좋지만 훨씬 간결한 맛이다. 쌀이 들어가지만 죽(粥)이 아니라 갱(羹), 하얀 뿌리채소가 들어 있는 수프 옥삼근갱(玉糝根羹)이다.
 

우리는 현재에 산다. 과거에서 발원해 끊임없이 흐르며 미래를 향한다. 잊혀져 가는 일만 가능한 흐름 속에서 음식도 그렇다. 냄비 안에서는 늘 퓨전이 일어난다. 잊어버린 현재의 것들을 통해 현재 음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도 의미있겠다. 최근 출간된 서유구 선생의 <임원16지> 중 '정조지'에 수록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맛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오래된 미래의 맛을 통해서. 

 

김은영 요리연구가.

코삿헌 음식연구소 운영. 뉴욕 자연주의 요리학교 NGI 내츄럴고메 인스티튜드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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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2021-01-24 16:40:11
글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김지현 2021-01-23 00:23:39
칼럼 내용이 생소하면서도 멋지네요. 음식에도 역사가 있다는 생각을 잘 안하게되는데 음식이 더욱 색다르게 느껴져요.
요즘 사람들은 한정된 음식에 그리고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져버려서 점점 옛 음식들을 찾지 않는것 같아 아쉬운 마음입니다
이 옥삼근갱이 제 미각을 되찾을 첫 음식이 될 것같아요.

정은혜 2021-01-22 21:52:26
아 그 순수한 무의 맛이 궁금하네요. 늘 접하면서도 진짜 그 맛을 아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

정미정 2021-01-22 20:47:43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약식 동원이네요
글맛도 참좋구요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강경애 2021-01-22 20:43:53
우리 식재료와 역사까지 아우르는 연구하시는 김은영요리연구가를 응원합니다. 앞으로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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