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쏟아져 내린 어느 날이었다. 희미하게 창을 때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었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눈발들은 창문에 부딪히며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 냈고, 나는 그 소리가 주는 안락함에 취해 한참을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창밖 거리는 밤새 내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얼마 전 후배가 건네준 보이차를 꺼내 뜨거운 물을 부어놓았다. 듀크 조단Duke Jordan의 《Flight to Denmark》를 꺼내 들었다.

1974년에 발표된 이 앨범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둘러싸인 설원 위 듀크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는데 음반 전체에 스산한 겨울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듀크 조단은 비밥 재즈의 전성기였던 40년대부터 당시 재즈 신의 주역이었던 찰리파커, 마일즈 데이비스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자신의 트리오를 이끌면서 재즈의 심장부인 뉴욕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의 화려한 재즈 자이언트들 사이에서 확연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로큰롤과 소울 음악의 부흥에 밀려 재즈의 인기가 점차 시들어가던 60년대에는 생활고로 인해 10여 년 동안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때마침 유럽에 불어닥친 재즈 열풍에 힘입어 덴마크로 초청공연을 가게 되고 그곳의 재즈레이블 ‘스티플 체이스’에서 향후 그의 대표 앨범중 하나가 되는 《Flight to Denmark》를 발표하며 새롭게 도약하게 된다.

<No problem>은 이 음반의 첫 곡이다. 원시적인 타악 리듬에 이어 콘트라베이스의 육중한 리프(Riff)로 시작되는 이 곡은 고음현을 타건하며 터져 나오는 애잔한 피아노 선율이 짧은 순간 깊이 각인될 정도로 선명하고 날카롭다.

차분하게 공간을 형성하며 들어오는 심벌과 세밀한 브러쉬 연주가 덧칠을 시작하면 본격적인 즉흥연주가 시작되고 풍부한 공간감을 가진 트리오의 연주는 새벽 찬 공기속에 서서히 스며든다.

첫 곡이 끝나면 서사적인 화성진행에 격조있는 멜로디를 가진 <Here's that rainy day>와 <Everything happens to me>의 스탠다드 곡들이 이어지고 <Flight to Denmark>, <Jordu>등 그의 자작곡들 또한 절제된 스윙리듬 위에 넘실대며 서정적인 선율들을 직조해낸다.

녹음 당시 고향을 떠나온 듀크의 황량한 고독감과 애수의 감정이 담겨있기 때문일까, 평범한 듯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연주 속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있는데 이 앨범의 보편성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사실 한창 난해하고 전위적인 현대재즈에 경도되어 있던 시절엔 그냥 흘려들었던 앨범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젊은 날의 뜨거움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중년의 나이가 돼서야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적당히 식어 따스해진 한 잔의 차처럼 시간을 거슬러 마음을 덥혀주는 바로 그런 음악이다.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네번째 월요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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