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떡.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 전통음식 빙떡' 유튜브 영상 갈무리)
빙떡.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 전통음식 빙떡' 유튜브 영상 갈무리)

신구간이다. 신들도 이승의 업무를 멈춘 겨울의 결정이다. 아버지와 잉걸불에 데워먹었던 빙떡이 소환된다. 마트에서 사 온 빙떡을 딸아이와 먹었다.  

빙떡은 막 구운 옥돔 살점을 얹어 먹을 때가 가장 맛있다. 메밀로 만든 조배기, 꿩칼국수, 범벅은 뿌연 김을 후후 불어가며 먹어야 제맛이다. 제주사람들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메밀로 만든 밥, 국수, 떡, 범벅을 먹었다. 지금도 몸국과 고사리육개장은 메밀가루를 풀어서 먹는다. 메밀은 육지에서는 구황작물이었지만 제주에서는 주곡이었다. 하지만 원조 밀가루가 들어오고, 쌀이 자급되면서 밥상에서 밀려났다.  

메밀은 단백질 함량이 100g당 10g 이상으로 두부보다 많다. GI지수(혈당지수)가 낮아 다이어트에도 좋다. 수용성 식이섬유 함량이 높아 변비 예방 및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메밀이 권장되는 가장 큰 이유는 루틴(rutin) 때문이다. 메밀은 루틴을 100g당 17mg 이상 함유하고 있다. 루틴은 모세혈관벽을 튼튼하게 하고 혈관의 투과성을 조절해 준다. 그래서 뇌졸중과 동맥경화 환자에게 추천된다. 메밀은 당뇨병 환자에게도 좋다. 루틴이 혈당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는 “메밀이 비위장의 습기와 열기를 없애 주며 소화가 잘되게 하는 효능이 있어 일 년 동안 쌓인 체기도 내려간다”고 기록돼 있다. 메밀은 성질이 찬 음식이다. 따라서 무더운 여름철에 먹으면 몸속에 쌓여 있던 열이 빠져나가면서 몸이 가벼워져 생기를 얻을 수 있다. 조상들이 여름철에 메밀국수를 먹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메밀껍질에는 살리실아민(salicylamine)이라는 독성물질이 들어있다. 이 독성물질의 해독제가 무다.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메밀은 원나라가 제주를 지배할 때 전래되었다고 한다. 원나라 관료들이 제주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독성이 있는 메밀을 전해주었으나, 제주사람들은 무채와 함께 먹어 메밀의 독성을 없앴다고 한다. 그 음식이 바로 빙떡이다.  

빙떡은 솥뚜껑을 뒤집어 돼지비계로 문지르고 메밀 반죽을 지져낸 후, 데쳐낸 무채를 넣어 빙빙 말아낸 전병이다. 빙빙 돌렸다고 해서 빙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전기떡이라고도 한다. 빙떡은 제주의 관혼상제에는 빠지지 않는 음식이기도 하다. 빙떡 맛의 정수는 담백함과 심심함에 있다. 육지 사람들은 맹맹한 맛의 빙떡을 제주사람들이 즐겨 찾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제주토박이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울푸드다. 

빙떡은 지진 메밀 반죽에 데쳐낸 무채를 넣어 빙빙 말아낸 전병이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 전통음식 빙떡' 유튜브 영상 갈무리)
빙떡은 지진 메밀 반죽 위에 데쳐낸 무채(왼쪽)를 넣어 빙빙 말아낸 전병이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 전통음식 빙떡' 유튜브 영상 갈무리)

메밀은 산에서 나는 밀이라고 해서 메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생육기간이 50∼60일로 짧고, 척박한 화산회토에서도 잘 자란다. 메밀은 푸른 잎, 하얀 꽃, 붉은 줄기, 검은 열매, 노란 뿌리를 갖고 있어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고도 한다. 메밀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연한 잎은 데쳐서 먹고, 꽃은 밀원으로, 껍질은 베갯속으로, 줄기는 사료로 이용한다. 

반면 젊은이들에게 메밀은 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메밀은 우리나라 경관직불 면적의 22%을 차지한다. 제주도에서는 오라동, 조천읍 와흘리, 안덕면 광평리, 표선면 보롬왓 메밀밭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

메밀은 세계적으로 12번째로 생산량이 많은 곡물이다. 국내에서는 돈이 되지 않아 재배면적이 급속도로 줄었으나, 최근 메밀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수요가 늘고 있다. 국내 소비량은 연간 4500톤인데 그중 50% 이상을 외국산으로 충당한다. 외국산은 국내산 가격의 1/2이 되지 않는다. 

제주도는 약 1000ha의 면적에서 전국 생산량의 30% 이상을 생산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때문에 메밀로 유명한 강원도의 재배면적은 제주도의 반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봉평축제에 제주메밀이 올라가기도 한다.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제주시 오라동 산 76번지 일대 메밀밭
제주시 오라동 산 76번지 일대 메밀밭. (사진=제주투데이DB)

메밀은 자청비가 농경신으로 좌정하는 내력담인 세경본풀이라는 제주신화에도 등장한다. 자청비는 그리스신화의 농경신 데미테르(Demeter)와는 차원이 다른 매력이 넘치는 여신이다. 스스로 청해서 태어난 여자라는 이름처럼 진취적이고 용감하며 총명하다. 

거기에다 남의 아픔까지도 어루만지는 신이다. 자청비는 문도령을 남편감으로 선택한 후 남장하여 문도령과 글공부를 같이 한다. 서천꽃밭 꽃감관 막내딸의 남편이 되기도 하고,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남편 문도령을 보내 같이 살도록 한다. 

정이 어신 정수남이를 두 번이나 죽였다가 살려낸다. 옥황에 변란이 발생하자 서천꽃밭에서 멸망꽃을 가져다가 난을 진압한다. 천자는 그 공을 인정하여 땅 한 조각, 물 한 조각을 하사하였으나, 자청비는 사양하고 오곡 씨앗을 얻어 문도령과 지상으로 내려온다. 

자청비는 오곡 씨를 뿌리다 보니 씨앗 한 가지를 잊어버린 것을 안다. 자청비는 다시 하늘에 올라가 씨를 받아와 보니 파종 때가 이미 늦어 있었다. 그래도 그 씨앗을 뿌리니 다른 곡식과 같이 가을에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그 곡식이 바로 메밀이다. 

앞으로 메밀은 부가가치가 높은 기능성 제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건강기능식품, 다이어트식품, 기능성화장품 시장에서 새로운 형태의 소재로 진화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메밀이 구전문학과 음식 등 삶속에 깊게 스며들어 있는 제주가 메밀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농·관·학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메밀 마스크 팩을 한 여성들이 메밀밭에서 피자빙떡에 메밀 꽃차를 먹으며 자청비 공연을 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수능 때문에 풀죽은 딸에게 말을 건넨다. “늦게 파종해도 다른 곡식과 같이 익는 메밀처럼 늦은 시작은 없다. 메밀의 독성도 약이 되듯이 아프고 쓰린 경험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거다. 다른 여자에게 남편을 내어줄 만큼 자신감을 가진 존재가 제주여성인데, 제주여성인 네가 이 일로 의기소침하면 자청비가 웃겠다. 수능 결과로 너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너 자신을 믿어라.”
 
딸아이가 고개를 들어 서른여덟 잇바디를 허우덩싹 웃어댄다. 그리고 메밀 전 특유의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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