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이 다 됐다.

제주에 정착하면서 자주 듣게 된 말이다. 환대의 마음으로 친근감을 표현해주는 말인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거의 10년 동안 “아 그래요? 고마워요”와 같은 반응을 해왔다. 하지만 고마움과 동시에 어색함과 답답함도 내 마음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느낌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대만에서 떠난 후에 늘 시달린 언어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쉽게 말하기 위해서 한동안 스스로 대만사람이라고 소개해왔다. 근데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편했다. “한국사람이 다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떠오르곤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다. 대만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클 때까지 정말 여러 번 정체성 설문조사를 받아본 적 있다. 예를 들어 “나는 1) 대만사람이다. 2) 중국사람이다. 3) 대만사람이기도 하고 중국사람이기도 하다. 4) 다 아니다. 5)기타 _____. “에 체크하는 식. 어릴 때 이런 설문조사지 앞에서 뭐를 고를까 고민하고 망설였다. 1부터 5까지 다 고르고 '기타'에다가 짜증을 썩은 마음으로 '모르겠다'라고 써넣고 해방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정체성과 관련해 배운 것들이 참 많다. 정체성은 학습된다는 것, 정체성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꼭 하나여야 하는 것도 아니란 것, 국가에 있어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 정체성의 차이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 있고 서로 상처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 굳어진 경계가 가진 정체성을 흔들어보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대만사람이라는 소개가 불편하기 때문에 간단한 자기소개가 필요할 때 대만 출신이라고 말했다. 간단한 말이면서 정체성에 대한 내 삶의 여정을 소개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으니 숨을 쉴 수 있었다. 정체성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는 일은 나에게 억압에서 해방을 향한 길과 비슷한 것 같았다. 

이런 마음으로 제주에서 정착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다. 모든 이들의 여정이 다 다른 것처럼 나도 나의 특별한 삶의 여정을 흐르는 물처럼 진행중이었다. '대만 출신'이라고 말하면서 열리게 된 문이 갑자기 “한국사람이 다 됐다”는 말 때문에 다시 닫히고 답답함이 느껴졌다. 물처럼 흐르는 내 삶의 여정에서 한 바가지를 떠서 그 한 바가지의 물에게만 말을 건네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국사람이 다 됐다'라는 '환대'앞에서 조금 망설였다. '한국사람'이 되어야 하나? 되는 것이 좋은가?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대만 출신인 내가 가진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한국사람이 다 됐다'라는 '정체성 초대장' 앞에서 예전의 정체성 설문조사지가 먼저 떠오른 것이다.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써넣은 기억이 났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봐야 알지' 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한국사람' 혹은 '제주사람'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불리지 않는 사람들이 다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정체성을 빛나게 가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한국사람이 다 됐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어도 '제주사람이 다 됐다'는 말은 들은 적 없었던 것 같다. 제주에서 태어난 내 아이는 제주사람이라고 해줄까? 우리집 마당에 검질(잡초)이 하나도 없다면 '제주사람이 다 됐다'는 말을 듣게 될까? 제주사람의 '정체성 초대장'을 받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다. 주변 한국 친구들도 대부분 제주에서 이주민이어서 닫힌 제주인 정체성을 열리게 하려고 애를 써서 정체성 투쟁을 하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제주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제주의 자연을 그의 돈벌이로만 여기는 사람은 육지 것이며, 비록 어제부터 제주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제주를 그의 생명처럼 아낀다면 그는 제주인이다.”라는 글이 한국 친구집의 현관문 위에 걸려 있었다. 이 문구를 보다가 나는 제주인이 되기보다 '육짓것'이 되기 더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혼자 재미있어 했다. '육짓것'과 '제주인' 외에 '기타 _____.'라는 선택지가 있다면 거기에다가 (여전히) '모르겠다'라고 (하지만) 자신있게 쓰겠다.

에밀리
에밀리

 

글쓴이 에밀리는 대만 출신이다. 제주에서 정착하기 전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랬고, 지금 제주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제주에서 아이를 낳았다. 육아에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다 쏟아붓는 일상 속에서 제주의 '인간풍경'을 글에 담고자 한다. 이 땅의 다양성을 더 찬란하게, 당당하게 피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게재한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