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음, 서제인 번역, 엘리

 

소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70년이 걸린 <옥스퍼드 영어 사전> 초판 발간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배경으로 삼는다. 사전의 모든 편집자가 남성이었고, 거의 모든 조수와 자원봉사자들 또한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참고한 문학작품이나 기사의 필자들 역시 남성이었다...

우선 ‘라떼 시절'의 이야기. 돌아가신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사전 예찬론자였다. 어린 딸이 새 학년이 될 때면 그는 사전을 선물했다. 함께 서점에 가서 국어사전·영어사전·옥편 같은 걸 골라주고, 그 사용법도 가르쳐주었다. 롱맨 영영사전이나 옥스퍼드 영영사전 같은 것들도 아버지가 사주었다. 그는 백과사전 전집을 사주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물론 나는 이미 있는 사전만으로도 충분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적 없는 용도로도 잘 썼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엎드려 잘 때 베개로 딱 좋았다. 아버지는 사전에 세상의 모든 단어들이 등재돼 있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에 대해서 자주 감탄했다. 그럴 때 나는 등에 지게를 멘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들은 커다란 집게를 들고 길바닥에 있는 단어를 하나씩 주워 담았다. 나는 그런 상상을 좀 불경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넝마주이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세상의 모든 단어들’은 틀린 얘기였다. 아버지도 나도 사전에 없는 많은 종류의 말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 사이의 대화에 등장해 본 일이 없었다. 둘 다 그것이 ‘말 아닌 말’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사전에 있는 세계, 그것까지가 아버지가 인정하는 세계였고, 딸에게 선물할 수 있는 세계였다. 욕설과 비속어,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유행어와 같은 사전 바깥의 말들은 자격이 없거나 너무 오염되어 있거나 천박하거나 쓸모없거나 유해한 것들이었다. 또한 그는 이미 확립된 세계의 질서를 신봉하는 군인이 아니었던가. 아버지는 ‘사전 바깥’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전의 세계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소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70년이 걸린 <옥스퍼드 영어 사전> 초판 발간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배경으로 삼는다. 사전의 모든 편집자가 남성이었고, 거의 모든 조수와 자원봉사자들 또한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참고한 문학작품이나 기사의 필자들 역시 남성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이 아름다운 역사 소설은 출발한다.

작품에는 많은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고, 역사의 중요한 대목들은 작품의 주요 서사로 차용된다. 이를 테면, ‘bondmaid(여자 노예)’가 누락된 일은 실제 사전 역사의 한 대목이다. 소설적 사건은 사전 편집자 아빠의 책상 아래에서 탄생한다. bondmaid가 적힌 쪽지를 주운 소녀 에즈미는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따로 챙겨두기 시작한 것이다. 사전에 등록되지 않고 버려진 단어 쪽지들은 에즈미의 친구 리지의 낡은 여행가방 안에 모이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지는 에즈미의 진짜 ‘여자 노예’, 사전에 실리지 않는 존재였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모든 말들이 사전에 실리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는 단어들의 사전>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백인 남성들이 경험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단어, 그들이 상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단어들의 편집본이 바로 사전이다. 멸시하는 언어들, 인간성을 파괴하는 언어들, 말끔한 기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언어들은 책상 아래로 버려지거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기록된 단어는, 멀쩡해 보여야 하는 세계들의 조각들이다. 버리진 말들은, 에즈미와 리지 같은 이들이 주워 담는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사전에 엎드려 자는 동안 상상했던 단어를 줍는 넝마주이의 얼굴을 이제야 이렇게 만나게 된 셈이다. 아름다운 넝마주이였다.

소설에서 bond-maid는 새롭게 정의된다. 그 시작은 리지가 에즈미에게. “단어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아가씨가 항상 말했잖아요. 그러니 ‘여자 노예’는 저 쪽지에 적혀 있는 걸 넘어서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가씨와 연결되어 있는 여자(bondmaid)였어요. 그리고 난 그 매일 매일이 기뻤어요.” 하녀였던 리지는 에즈미와의 관계를 결속된bond 여자로 바꾸어 놓는다. 신분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연대가 채웠다. 그것은 더 나아가 ‘어머니’를 나와 당신의 bond-maid로 만들어놓는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여자 노예. 한동안, 이 아름답고 복잡한 단어는 제 어머니에게 속해있었습니다.”

bond-maid는 하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람들을 엮는 단어로 새로 쓰여진다. 이 연대와 결속에는 아무도 배제되는 이가 없다. 누구도 어머니와의 결속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옥스퍼드 사전 초판본에는 수록되지 않았던 아름다움이다. 버려진 단어의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이 자기의 생애로 써낸 미학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한 사전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의 유전을 꿈꾸는 것이었지만, 세계 밖의 말들은 이미 힘이 세다. 말들은 서로 고리를 만들어 떠돈다. 놀랍게도 그 고리가 말들의 비상을 가능하게 한다. 당신의 말도, 나의 말도 그 말들의 비상을 결코 막지는 못한다.

p.s. 해마다 연말이면 옥스퍼드 사전 선정 ‘올해의 단어’를 발표한다. 2019년에는 ‘기후 비상사태(climate emergency)’였고, 2020년에는 선정을 포기했다. 이유는 하나의 단어로 추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COVID-19, Pandemic(팬데믹), social distancing(사회적 거리두기), mask(마스크), superspreader(슈퍼 전파자) 등등의 말들 사이에서 옥스퍼드는 아무 것도 고르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2020년을 편집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항상 사전 바깥을 먼저 산다.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혹은 책 변두리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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