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제주 원도심) 토박이가 마실을 다니듯 제주도 최초의 터를 찾아다닌다. 사라져 버린 것, 남아 있는 것, 사라질 것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주민들이 만들어 가는 원도심 도시재생의 방향성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1980년대 관덕정 주변.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에서 발췌)
1980년대 관덕정 주변.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에서 발췌)

남아 있는 것:관덕정과 벽화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물 제322호이다. 세종 30년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기 위해 지었다는 기록이 <탐라지>에 남아 있다. 건물 내부 대들보에는 당시에 그려진 십장생도(十長生圖),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등의 격조 높은 벽화와 ‘호남에서 제일가는 정자’와 ‘탐라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란 뜻의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과 ‘탐라형승’(耽羅形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한 번쯤 신발을 벗고 올라가 벽화와 글씨도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관덕정은 제주의 역사와 제주인의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상징적 공간이다. 조선 시대에는 인재들을 등용하던 과거시험(소과 초시), 군사 훈련장, 그리고 조정으로 보낼 진상품의 최종 점검장소였다. 1901년 외국인 신부의 위세를 믿고 범법을 자행하던 천주교도에 저항하여 일어난 신축민란(이재수의 난. 올해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때 수많은 천주교도가 피살된 곳이기도 하다. 

근대에는 제주 4·3사건의 기폭제가 됐던 1947년 3·1절 기념식 후 해산 과정에서 경찰들의 발포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의 유격대장인 이덕구의 주검이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일반에게 공개되었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제주의 슬픈 역사 현장이다. 

관덕정 앞 광장의 오일장(성안장) 풍경.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에서 발췌)
관덕정 앞 광장의 오일장(성안장) 풍경.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에서 발췌)

1910년대까지도 입춘 무렵에 제주도 내 무당들의 우두머리인 ‘도황수’를 뽑는 입춘굿 놀이가 해마다 열렸고, 1906년 제주도 최초의 오일장이 개설되었으며, 1952년 제주도청이 광양으로 이전하자 제주 미국공보원과 도의회가 사무실로 함께 사용했었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관덕정 주변은 관제 동원 행사와 한라문화제(지금의 탐라문화제) 경연 등을 하는 제주 유일의 광장 역할을 했었다. 현재는 간헐적으로 관 주도의 이벤트성 행사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변 상권이 침체한 데다 지역주민 이용도 역시 저조한 상황이다. 

제주 최초의 오일장 터라는 공간의 역사성에 근거하여 주변 상인들과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정기적인 주말장터인 일명 ‘관덕장’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해 본다. 

사라져 버린 것:분수대

관덕정 앞에 있었던 분수대는 1961년 재일 교포 모임인 제주개발협회가 어려운 고향 제주의 발전을 기원하며 기증한 것이다. 분수대를 처음 접하는 도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도 전속사진사들이 있어서 분수대가 인기 있는 포토존이었다. 그러던 관덕정 분수대는 제주목(牧) 관아지 복원사업으로 인해 1999년 7월에 철거되었다. 철거할 때 기증해 주었던 재일 교포 단체에는 양해를 구했을까? 

분수대를 철거하고 복원된 제주목 관아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기존 도로보다 많이 낮아져서 제주목 관아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조선 시대의 지표면 높이로 맞춘 결과라고 하지만 오히려 공간이 단절되고 협소해져서 광장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제주목 관아 진해루의 대문을 활짝 열어 광장의 범위를 제주목 관아까지 확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0년대 관덕정과 지금의 관덕정.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에서 발췌)
1990년대 관덕정과 지금의 관덕정.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에서 발췌)

남아 있는 것:돌하르방

돌하르방은 제작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성문 앞에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경계 표시 또는 성안의 안전을 지키는 종교적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에는 벅수머리, 무석목(武石木), 우석목(偶石木) 등으로 불렸다. 문헌에는 옹중석(翁仲石)으로 표기한 예도 있으나 현재에는 쓰이지 않는다.

해방 전후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부르던 ‘돌하르방’이 이 석상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과 관련하여, 몽골의 한반도 지배와 관련된다는 '북방설'과 동남아 일대에서 유사한 석인상들이 발견된다는 점에 착안한 '남방설', 조선 시대 때 자체적으로 세웠다는 '자생설' 등이 있지만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했다. 2011년 12월 젠핑현 헤이수이진에서 발견된 중국 요(遼)나라 시대 석인상(石人像)도 제주 돌하르방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관덕정 돌하르방(왼쪽)과 요나라 석인상(오른쪽). (사진=왼쪽은 고봉수 제공, 오른쪽은 베이징 역사문화채널 북경반점 유튜브 영상 갈무리)
관덕정 돌하르방(왼쪽)과 요나라 석인상(오른쪽). (사진=왼쪽은 고봉수 제공, 오른쪽은 베이징 역사문화채널 북경반점 유튜브 영상 갈무리)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이전까지 제주는 국내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많은 신혼부부가 방문하였다.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거나 가루를 내어 물에 타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서 미신인 줄 알면서도 재미 삼아, 또는 진심으로 아들을 바라는 심정으로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는 신혼부부들도 많았다. 그때 제주에서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면 70·80년대 출생자 중 많은 사람이 제주와의 인연을 이미 시작한 것이 아닐까?

고봉수.
고봉수.

제주 성안(원도심)에서 태어나 5대째 사는 토박이. 고교 졸업 후 30년만인 2012년 한짓골에 있는 생가로 돌아와 보니, 과거 제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의 침체한 모습을 보면서 도시재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관덕정 광장 주변 활성화 사업’의 주민협의체 대표로 활동했다. 2020년에는 제주목 관아를 사적공원(시민공원)으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을 도의회에 제출한 ‘원도심 활성화 시민협의체’의 대표를 맡았다. 한짓골에서 건축 관련 사무소 ‘이엠피 파트너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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