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제사상. (사진=제주투데이DB)
제주도 제사상. (사진=제주투데이DB)

설날의 ‘설’은 원래 설다(낯설다)의 어근에서 왔다고 한다. 또 삼가다는 뜻을 가진 옛말 ‘섧다’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한자로는 새해 첫날이라고 해서 원단(元旦)이라고 하고, 삼가는 날이라고 해서 신일(愼日)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낯선 세상에서 접촉을 삼가며 살아가고 있으니 매일매일이 설날이기도 하겠다.) 

제주에서의 설은 차례가 아닌 제사이기 때문에 제사상을 차린다. 당연히 떡국은 올리지 않으며 떡국을 먹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릴 때는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주에서는 제사를 ‘시께’라고 한다. 누구는 시께가 한자 식개(食皆)에서 왔다며,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날이라고 한다. 

내가 어릴 때는 제사가 끝나면 ‘시께퉤물(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을 똑같이 나누어 먹었다. 상애떡을 만들어 이웃들에게 돌렸으며, 본 제사 전후로 문전제(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문전신에 대한 제의), 조왕제(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에 대한 제의), 안제(부귀영화를 담당하는 안칠성에 대한 제의)를 지냈었다. 

문전제는 지금도 지낸다. 문전상을 따로 진설했다가 본 제사 전에 현관문 앞에서 문전제를 지내고 올레코시(술잔에다 상에 올렸던 제물들을 조끔씩 뜯어놓고 올레에 던지는 것)를 한다. 그리고 문전상을 부엌으로 넘기면 어머님이 조왕신에게 고사를 지낸다. 

본 제사 말미엔 걸명(숭늉에 떡, 적 등 상에 올렸던 음식을 뜯어 놓는 일)을 하여 코시(고사의 제주어)한다. 제사는 조상신뿐만 아니라 집안을 지키는 신들에게 식사를 올리고, 친척뿐만 아니라 이웃들까지 음식을 먹었던 공식만찬(共食晩餐)이었다. 

이처럼 제주에는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 공식(共食)문화가 발달했다. 제주 고사리 육개장에는 건더기가 없다.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고사리도 잘게 찢어서 걸쭉한 국물로 만든다. 고사리 하나에서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반영된 문화다. 

그러한 의식은 반(班)문화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제주에서는 혼(婚)·상(喪)·제(祭)례뿐만 아니라 마을 행사 때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고기와 떡 및 과일을 똑같이 분배한 반을 받았었다. 어느 누구의 반에 고기 한 점이라도 빠지면 소리가 났었다.  

프랑스 브리아 사바랭(Brillat-Savarin)의 <미식예찬>이란 책에는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말처럼 현대는 먹거리에 의하여 개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2020년, 유엔이 발간한 ‘세계 식량안보 및 영양상태’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이 6억8000만 명이라고 한다. 또 2017년, ‘EAT스톡홀름 식량포럼’의 자료에 의하면 비만인 사람이 7억1000만 명이라고 한다. 누구는 먹지 못해 굶주리고, 누구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을 앓고 있다. 소득이 낮을수록 열량이 많고 영양가는 낮으며 식품첨가물이 많은 정크 푸드(junk food)를 먹고, 소득이 높을수록 친환경농산물 등 건강식을 먹는다. 

먹거리 불평등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무감했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고기 한 점만 빠져도 큰 소리가 났었던 평등 지향적 제주 식문화를 되살릴 방법을 고민해본다. 기본 먹거리만큼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국가는 최저생계비 이하 및 차상위 계층까지 복지용 쌀인 나라미를 공급하고, 학교급식, 임산부 친환경꾸러미를 통해 친환경농산물 공급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먹거리의 질적 불평등을 해소할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라도 건강한 먹거리를 먹을 권리를 헌법에서 보장해 먹거리의 질적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 
      
제주의 제사상은 육지부와 매우 다르다. 제주에서는 탕, 강정, 식혜를 올리지 않는다. 대추, 밤, 곶감도 거의 올리지 않는다. 대신 감귤류나 수박, 참외 등을 올린다. 육지부에서는 삼적(육적, 어적, 계적)을 올린다. 

반면 제주에서는 보통 이적을 올린다. 육적으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올리고, 어적으로는 상어고기를 올렸으나 요즘은 소라나 문어를 올린다. 물론 형편에 따라 돼지고기적만 올리기도 한다. 닭고기를 올리는 집은 없다. 묵이나 두부전과 구운 옥돔은 반드시 올라간다. 롤빵이나 카스테라 등 빵과 음료수를 올리기도 하고, 호박이나 양하로 만든 탕쉬(나물무침)를 올리기도 한다. 

제주사람들은 제법(祭法)에 얽매이지 않고 직접 재배하거나 채취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나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을 올렸던 것이다. 아버지가 낚아온 옥돔에 우영팟(텃밭)에서 뽑은 무를 넣어 만든 옥돔무국을 올렸고, 아버지가 추렴해온 돼지를 썰고 꿰고 구워서 돼지고기적을 마련했다. 고사리를 제외하면 제철 음식이 아닌 것이 없었다. 제철 로컬푸드로 제수를 장만했던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식량 교역이 확대되고, 수송·저장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농산물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농산물 수입이 급증하였고, 그 결과 그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1994년, 팀 랭(Tim Lang)은 푸드 마일리지(food milage)라는 지표[식품의 양(ton)×이동거리(km)]를 만들었는데, 토마토케첩에 들어가는 토마토의 푸드 마일리지는 제주산 토마토보다 224배나 길다. 2012년 국립환경과학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의 1인당 푸드 마일리지는 7085t·km로 2001년의 5172t·km보다 37% 증가했다. 이는 프랑스의 10배, 일본의 1.3배 수준이었다. 

푸드 마일리지를 줄이는 음식이 바로 로컬푸드다. 로컬푸드는 제주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영팟에서 키운 배추·무·호박으로 국을 끓였고, 우영팟에서 키운 쪽파와 마늘로 양념을 했다. 우영팟이 식재료 생산·공급 기지였던 것이다. 우영팟으로 인해 제주도는 농(農)과 식(食) 사이의 거리가 가장 짧았었다. 하지만 편리함과 도시화로 우영팟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우영팟의 영역을 제주도 전체로 확장한 ‘제주도의 우영팟화’를 위한 전략적 소비가 필요하다.
  
첫째, 농과 식의 물리적 거리가 짧은 음식을 선택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농식품을 소비해야 한다. 그러면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어들고, 식품의 신선도와 안전성은 극대화된다. 생산자는 복잡한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아 소득이 늘어난다. 

둘째, 농과 식의 시간적 거리가 짧은 제철음식을 즐겨야 한다. 소비자가 제철 농산물을 선호해야 농민은 비닐하우스에 투입되는 에너지를 줄여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게 된다. 제철음식은 맛과 영양도 좋아 건강에도 이롭다.   

올 설 제수품은 코로나로 인해 소량만 준비해도 되기에 직접 키우거나 잡은 것으로 마련했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되면 제주산, 그마저도 안 되면 국산으로 구입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했으면 더욱 좋겠다. 직접 제수를 마련하고 반을 나누어 먹었던 조상들처럼. 또한 남자들이 칼을 들고 물에 손을 묻혔으면 한다.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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