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죽었다? 아마도! 책은 죽었다? 어쩌면! 그런데도 우리는 읽고 쓴다. 말이 있는 한 그렇다.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표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표지.

 

성공한 노작가의 에세이집은 사실 별로다. 지나치게 매끈하거나 과하게 예언적이거나. 그럼 SF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1929~2018년)의 에세이는 어떨까? 그녀를 택한 까닭은 순전히 ‘말’ 때문이었다. 어슐러 르 귄의 서평과 서문을 모아놓은 에세이집 제목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황금가지 펴냄, 2021)이고, 원제는 ‘Words are my matter’다. 나는 그 ‘말’을 마르코스의 말과 겹쳐 읽었다. 

마르코스? 검은색 스키마스크를 뒤집어 쓴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란군의 부사령관 마르코스! 그가 세상을 향해서 던진 무수한 메시지들을 모은 책이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Our word is our weapon>(2002년)이고, 거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말이었다. 말이 날 형성했고 말이 퍼져나가 날 통제했다. 전복적인 결말, 그러나 난 안다. 동굴 안에 몇 사람이 침묵하여 모여 있는 것을.” 미리 앞질러 말하면, 르 귄과 마르코스, 그 둘은 말의 전사들인 셈이다.

르 귄의 전장은 문학 그 한복판이다. 가령 이제는 세계문학사에 빠질 수 없는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이 책에서도 곧잘 소환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자세한 묘사” 덕분에 시간을 거슬러 엘리자베스 시대로의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그 꼭지의 제목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SF 쓰는 방법 배우기’다. 장르문학이든 본격문학이든(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말’이라는 게 르 귄의 핵심적인 주장이지만), 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바로 ‘상상하기’ 혹은 ‘상상 가능성’이다. 그 안에서 모든 말들은 자유롭고 동등하다. 말들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구축한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만 눈을 돌려보면 ‘디스토피아’가 펼쳐진다. 혹시 칙릿(chick lit)이라고 아시는지?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같은 작품들을 부를 때 쓰는 말이고, ‘젊은 여자애들의 문학’이라고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젊은 상남자들’ 혹은 마초적인 성격의 작품들을 ‘프릭 릿(prick lit)’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비평에서도 자주 쓰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아는 이조차 드물다. 이런 사정에 비춰보면, 칙릿이라는 이름에는 모종의 의도가 있다. 

오늘날 문학이 가벼운 읽을거리로 전락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렇게 부르는 한편, 가벼움, 소비지향성 등등을 여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퉁 쳐서 묶어버리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문학이 없거나 모자라거나 서툴다는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르 귄에 따르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문학사에서도 손꼽히게 예외적 인물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나오자마자 정전의 반열에 올랐으나 버지니아 울프는 그 목록에서 배제되었다고 꼭 집어 말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어쩌다 튀어나온 놀라운 규방문학쯤이랄까. 

르 귄은 ‘장르(genre)’라는 말에도 할 말이 많다. 장르가 문학 용어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장르문학으로 지칭된 이야기들에 대한 차별과 무시와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제는 대부분 사람들이 “장르”라고 하면 그 칭호만으로도 열등한 소설 형태라고 이해하는 반면, 리얼리즘 소설은 그저 소설이나 문학이라고만 불립니다. 그러니까 우린 소설 유형의 위계를 받아들이고, 뭐라고 딱 정의가 되지는 않지만 거의 철저히 리얼리즘으로만 구성된 “문학적 소설”을 그 위계 꼭대기에 올린 겁니다.” 

이미 장르는 무너졌다고, 그건 지난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덮고 넘길 수가 없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도 <뉴요커>와 같은 ‘정통’ 매체에서는 장르소설 읽기를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고 표현했다. 위계의 역사는 힘이 세다. 그렇게 힘센 것들에 둘러싸여 말을 다루어온 르 귄은 ‘여성 SF작가’다. 

두 겹의 차별이 그녀의 생애 내내 있었다는 뜻이다. “세상엔 많은 나쁜 책들이 있지요. 나쁜 장르는 없어요.” 이토록 담담한 진술은 그 어투와 다르게 치열한 핏빛의 진정성을 느끼게 만든다. 나로서는 그저 뒤늦은 경의와 경배를 표할 뿐!

그리고 하나 더. 르 귄은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나와 당신의 자리를 묻는다. “우린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고, 읽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파였어요. 엘리트가 아니라 그냥 소수파예요. 이 세상 사람들 다수는 즐거움을 위해 글을 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고, 어떤 사람들은 읽으려고 하지 않죠.” 

문학은 죽었다? 아마도! 책은 죽었다? 어쩌면! 그런데도 우리는 읽고 쓴다. 말이 있는 한 그렇다.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Words are our matter! Our word is our weapon! 함께 깃발 드실 분?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한뼘읽기'는 제주시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이 한권 혹은 한뼘의 책 속 세상을 거닐며 겪은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다. 사전적 의미의 서평 즉, 책에 대한 비평보다는 필자들이 책 속 세상으로 산책을 다녀온 후 들려주는 일종의 '산책담'을 지향한다. 두 필자가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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