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는 16일 오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4·3특별법개정안의 조속 처리를 촉구했다.(사진=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제공)
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는 16일 오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4·3특별법개정안의 조속 처리를 촉구했다.(사진=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제공)

‘4·3특별법’ 개정, 우리의 성과이지만 그 성과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73년이 걸렸다. 잊혀지고 지워지길 강요당하며 공포와 고통 속에서 침묵한 50여년 세월에 더해, 1999년 ‘4·3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보고서>가 채택되고,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이라고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이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고, 마침내 2021년 2월 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소위에서 희생자 배․보상, 군사재판의 무효화 등의 내용이 담긴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다루어지기까지.

물론 아직 10여일이 남아 있다. 행안위 전체회의를 거쳐 큰 이변이 없다면 법사위와 26일 본회의에서 통과가 될 것이다. ‘피해 구제를 통해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4·3특별법 개정은 이번 임시국회가 사실상 마지노선인 만큼, 여야간 합의에 의해 마지막 절차를 밟고 있는 만큼, 여러 쟁점에도 ‘4·3특별법’ 개정안은 통과될 것이다. 아니 통과되어야 한다.

아직 섣부를 수도 있지만,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더라도 다시 용역 결과와 보완 입법과정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번 4·3특별법 개정이 제주도민과 유가족분들께 조금이라도 위로와 명예회복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비극적 제주 현대사의 한 매듭을 지었으면 한다. 70여년이 넘는 ‘고통과 피해의 역사’에 한 매듭을 지었으면 한다.

우리는, 제주도민은 이런 매듭을 지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아 긴 침묵 속에서도 끝내 기억해 왔고, 우리 세대는 4·3의 학살 경험으로부터 뼛속 깊숙이 새겨진 두려움과 패배주의를 조금씩 이겨내 왔으며, 마침내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이제사 말햄수다”고 외쳐왔고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4·3특별법 개정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성과이자 한 매듭이고, 우리 사회 민주화 진전의 성과이다. 두 세대에 걸친.

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砒)
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砒)

갇히지 말아야 한다, 이 성과에. 갇혀서는 안된다. 우리 자신의 역사이기에, 우리가 매듭지어야 할 역사이기에, 이번 4·3특별법 개정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화해’와 ‘상생’의 이름으로 매듭을 짓는다고 해도 아직은 ‘한 매듭’일 뿐이다. 누군가 4·3특별법 개정을 4·3의 ‘완전한 해결’이라고 주장한다. 학살 책임자에 대한 규명 없이, 특히 학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의 책임 규명과 사과 없이 ‘완전한 해결’을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위자료 등의 특별 지원?’ 한 발 물러서서 ‘위자료’라는 표현에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배·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특별 지원’인가? 4·3이 특별한가? 지난 4·3 70주년 이후 우리는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4·3의 전국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국의 많은 국민들이 4·3의 비극에 대해 알게 됐고, 이번 4·3특별법 개정 과정에서도 함께 힘을 보탰다. ‘특별 지원’에 우리를 가두어서는 안된다. ‘4·3의 전국화’는 4·3을 전국에 알리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전국의 전후 민간학살의 역사가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진정 4·3은 전국화 된다. ‘특별 지원’은 바로 4·3 전국화의 한 측면을 가려버린다. 전후 민간인 학살과 4·3이 하나의 문제라는 것을 분리시켜 버린다.

4·3의 전국화는 4·3을 전국에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전국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완성된다. 4·3을 포함한 전국의 전후 “국가폭력의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피해회복 조치이자 명예회복 조치이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스스로를 치유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거듭나는 길”이어야 한다. 4·3특별법 개정은 그 첫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수식어 없는 ‘배·보상’이 맞다.

나아가 4·3은 제주도, 한반도 문제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발생한 동아시아지역의 제노사이드의 일부이다. 이 문제까지 규명될 때 4·3의 ‘완전한 해결’을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4·3특별법 개정은 ‘완전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의 한 매듭이고, 아직은 그 두 번째 걸음을 향한 첫 발자욱일 뿐이라고.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다. 3년 전 70주년 전야제 추모사에서 현기영 작가는 이렇게 썼다. “4·3항쟁의 대의명분은 옳았습니다. 그러므로 4·3의 조상님들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4·3항쟁이 역사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했을 때야 비로소 4·3 원혼들이 편안히 진혼되어질 것입니다.” 4·3 정명의 문제이다. 4·3‘사건’의 성격 규정 문제이다. 이는 두 세대에 걸친 70여년의 역사를 뛰어넘는 문제이다. 100여년에 걸친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문제이다.

4·3은 해방 후 미군정과 그 하수인인 친일세력, 서청 등의 탄압에 맞서 친일청산과 자주적인 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제주도민들의 항쟁이었다. 5·18이 학살로 끝났다고 ‘5·18학살’, ‘5·18사건’으로 불리우지 않듯이, 4·3항쟁이 학살로만, 피해자로만 자리매김되어서는 안된다. 4·3의 정명, 4·3사건의 성격 규명은 과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 4·3항쟁이 제기했던 문제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3의 정명은, 4·3의 성격 규명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만큼만 이루어진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