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 촌놈인 나는 입으로 봄을 느낀다. 꽃대에 맺힌 쌉싸름한 물 망울을 빨 때 봄이 왔음을 느끼고, 유채꽃 봉오리를 절인 동지김치에 막걸리를 한잔할 때 봄의 결정을 맛본다.

노란 배추 꽃. (사진=제주투데이DB)
노란 배추 꽃. (사진=제주투데이DB)

날씨가 풀려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 튼다는 우수(雨水)다.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땅속에서 잠자던 1억5000만 마리의 미생물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김종순 시인의 시처럼 새순이 한 알 진주로 돋아난다. 

제주도는 아열대 기후여서 겨울에도 흙을 파면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나 푸름’이라고 초록을 자랑하는 밭 위로 스프링클러가 돌아간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위의 시인들처럼 겨울잠을 깬 동물과 싱그러운 새싹에서 봄이 왔음을 크게 실감하지 않는다. 제주사람들에게 봄은 배추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릴 때 다가오고, 유채와 보리가 바람에 출렁이면 결정으로 치달으며, 연지곤지를 칠한 한라산 철쭉이 떨어지면 떠나간다. 

천상 촌놈인 나는 입으로 봄을 느낀다. 배추 꽃대를 꺾어 이빨로 껍질을 벗기고 꽃대에 맺힌 쌉싸름한 물 망울을 빨 때 봄이 왔음을 느끼고, 유채꽃 봉오리를 절인 동지김치에 막걸리를 한잔할 때 봄의 결정을 맛본다. 그리고 구수한 된장 향이 가득한 양애(양하)순 국을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면 봄은 끝난다. 나에게는 꽃 음식이 봄 자체다.    

꽃은 눈으로 감상하는 화훼로만 알고 있지만 음식 재료로도 역사가 오래다. 약 1300년 전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는 조일(음력 2월 13일)에 백가지 꽃으로 만든 ‘백화떡’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 여러 가지 꽃으로 만든 화찬(華餐)이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정조지(鼎俎志)에 암향탕(暗香湯: 매화꽃 국), 향화숙수(香花熟水(찔레꽃으로 만든 음료), 송황다식(松黃茶食:송홧가루 과자), 담복자방(薝蔔鮓方: 치자꽃 절임), 도화주(桃花酒: 복숭아꽃 술) 등 꽃을 이용한 40여 가지의 음식이 소개되어 있고,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진달래, 참깨, 들깨 꽃을 이용한 조리법이 실려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진달래꽃, 찔레꽃, 국화로 만든 화채나 떡을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렸고, 민간에서는 진달래 화전을 부치고, 꽃술과 꽃차를 담가 마셨다. 그래서 삼짇날(음력 3월 3일)에는 진달래전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는 국화전이나 국화차를 먹는 세시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크로커스 꽃(왼쪽)의 암술을 채취해 말린 사프란(오른쪽). (사진=플리커닷컴)
크로커스 꽃(왼쪽)의 암술을 채취해 말린 사프란(오른쪽). (사진=플리커닷컴)

서양에서는 꽃을 식용한 문화가 중세 때부터 일반화됐는데, 주로 향신료나 약을 만들어 먹었다. 스페인의 대표 음식인 파에야(paella de campo)에 들어가는 향신료인 사프란(saffron)은 크로커스(crocus) 꽃의 암술을 채취해 말린 것이다. 

사프란 1g을 만들기 위해서는 500개가 넘는 암술을 핀셋으로 일일이 따서 말려야 한다. 그래서 사프란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 중 하나이다. 크로커스 암술은 붉은색이지만 요리에 넣으면 요리가 노란색을 띤다. 사프란은 스페인과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쌀 요리에 주로 쓰이고, 프랑스에서는 소스 재료로 사용하며, 서아시아에서는 차로 마신다.   

최근 참살이(‘웰빙’의 순우리말;편집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꽃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선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음식에 이용되는 꽃은 대부분 금어초, 베고니아, 팬지, 자스민 등 원산지가 외국산이다. 조리된 음식도 전, 떡, 술이 아닌 샐러드, 차, 음료, 아이스크림, 캔디 등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 음식이 서양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지난 2013년 농촌진흥청의 식용 꽃 성분을 분석한 결과 항산화성분인 폴리페놀(polyphenol) 함량이 채소나 과일보다 10배 이상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폴리페놀은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산화를 방지하는 항산화 작용을 해 치매나 파킨슨병 등 뇌 질환 및 노화를 예방하고, 심혈관질환 방지에 효과가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식용 꽃은 비타민, 미네랄 등의 공급원일 뿐만 아니라 화려한 색과 향으로 식욕을 촉진하고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 

배추 꽃대. (사진=제주투데이DB)
배추 꽃대. (사진=제주투데이DB)

제주에는 육지부에 없는 꽃 음식이 존재한다. 제주는 겨울에도 눈 맞은 배추로 쌈을 싸 먹는 등 녹색 채소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김장하는 문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김치하면 동지김치가 먼저 떠오른다. 

2~3월이 되면 땅에 바싹 엎드렸던 배추와 유채에서 새잎이 돋아나고 꽃대가 올라오는데 이를 동지나물이라 한다. 이 동지나물로 담근 것이 바로 동지김치이다. 제주사람들은 동지김치로 김장김치를 대신했고 춘곤증을 이겨내었다. 

또 하나는 추석 무렵에 먹는 양애(양하;편집자)꽃 줄기 무침이다. 땅을 뚫고 나오는 보랏빛 꽃줄기를 무친 양애무침은 독특한 향과 쌉쌀한 뒷맛이 매력적이다. 요즘은 장아찌로도 많이 해서 먹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음식들은 꽃 음식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음식 목록에는 없다.  

양애(양하). (사진=제주투데이DB)
양애(양하). (사진=제주투데이DB)

식용 꽃 시장은 아직 미미하여 관광농원이나 식물원에서 식용 꽃 체험 형태로 형성되고 있다. 상품 종류도 향신료 등 가공품보다는 생식용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식용 꽃은 젊은이들에게 흥미를 끌 수 있고 농업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 큰 소재다. 특히 한 해 1500만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제주도에서 꽃 음식은 틈새시장이 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제주에 자라는 꽃 중 식용 가능한 꽃의 기능적 가치를 발굴하여 활용 가능한 정보를 제공하고 건조·저장 및 향신료 등 가공 기술을 확립할 수 있다. 스토리텔러는 스토리를 가미하고, 전문 셰프는 소비자가 선호하는 레시피를 개발하며, 농업인은 친환경으로 식용 꽃을 키워 내면서 협업해 나가면 올레길처럼 제주의 히트상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꽃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천꽃밭 감관이 된 할락궁이가 떠오른다. 그리고 천년장자에게 죽음을 당해 대나무밭에 버려진 할락궁이 어머니 이마에 자랐던 동백나무에서 통째로 뚝뚝 떨어지는 진홍 동백꽃 송이가 보인다. 이어서 떨어진 검붉은 꽃잎들이 찻잔 안에서 스스로 펼쳐지는 것이 그려진다. 환생이다.

배추꽃 동지를 꺾어 입에 물으니 봄 냄새가 입 안에 가득 차고, 코로나로 처졌던 몸이 생기를 되찾는다. 여러분도 동지김치로 봄을 만끽하며 환생하기를 빈다.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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