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양환경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각양각색의 당근들이 개성을 뽐낸다. 그 다양성이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운 개성들은 상자에 담기는 순간 문제점으로 전락한다. 상품 기준에 맞지 않는 당근들은 가차 없이 버려진다. 인간세계라면 명백한 신체적 차별 행위로 처벌 대상이다.

 

각양각색의 당근. (사진=보타리친환경학교 제공)
각양각색의 당근. (사진=보타리친환경학교 제공)

미나리를 닮은 당근 잎사귀를 잡아당긴다. 홍당무가 검은 흙에서 쑥쑥 올라온다. 배구선수처럼 잘 빠진 놈들도 올라오고, 누구 심보같이 배배 꼬인 놈들도 올라온다. 속 찬 놈들도 올라오고 속 빈 놈들도 올라온다. 산삼과 닮은 흰 놈도 올라오고 순무처럼 보이는 붉은 놈도 올라온다. 

토양환경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각양각색의 당근들이 개성을 뽐낸다. 그 다양성이 아름답다. 그러나 이건 이해당사자가 아닌 나의 시각일 뿐이다. 그 아름다운 개성들은 당근 상자에 담기는 순간 문제점으로 전락한다. 농산물 상품 기준인 표준규격에 맞지 않는 당근들은 가차 없이 버려진다. 

감귤은 더 심하다. 아무리 맛이 좋아도 지름이 49㎜ 미만이거나 71㎜이상(무게로는 53g 미만이거나 135g 이상)이면 비상품이다. 먹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도 모양이 불량하거나 병해충 피해가 살짝 남은 경결점과도 상품에 들어가지 못한다. 평균치에서 너무 멀어지면 감귤 취급을 받지 못한다. 못생겨도 마찬가지다. 인간세계라면 명백한 신체적 차별 행위로 처벌 대상이다. 

배배 꼬인 놈도 가공하면 당근 강정이 되고, 벌어진 놈도 즙을 짜면 ABC주스(사과(apple)·비트(beet)·당근(Carrot)으로 만든 주스:편집자)가 되며, 순무처럼 생긴 놈은 된장에 찍는 순간 별미가 되고, 산삼처럼 생긴 놈은 아이들이 다름을 이해하는 훌륭한 교재로 쓰일 수 있다. 

버리는 것이 줄어들어 재배면적을 줄일 수 있고, 재배면적이 줄어드는 만큼 농약과 비료도 덜 쓰게 되어 환경도 보호할 수 있으며, 농부들의 소득 또한 늘어날 수 있다. 이런 못난이 농산물들은 그만큼 병충해와 싸우기 위해 방어물질을 껍질에 더 축적했기 때문에 우리 몸에 좋은 성분을 많이 함유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잘생긴 농산물을 선호하는 한 상상에 불과하다. 소비자들이 못생기고 벌레 먹은 농산물도 시장바구니에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어야 자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농약과 비료에 죽어가는 땅을 살릴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원산지인 당근은 16세기에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근은 한자 당(唐)과 근(根)이 결합된 이름이다. 당나라 뿌리라는 뜻이다.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과 문화의 집결지로 그 시대 최고의 도시이자 세계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그 시대 이후에도 중국에서 들어온 좋은 물건에는 당자가 붙었다. 당나귀, 당면(唐麵), 당모시, 당피리, 당단풍나무가 그 예이다. 

당근은 그 이름처럼 뿌리채소의 황제로 불린다. 당근은 체내에서 비타민 A로 전환되는 베타카로틴 함량이 가장 높은 채소다. 베타카로틴은 항산화 작용과 항암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심혈관질환과 암을 예방하고 시력 감퇴 및 노화를 억제한다. 삼성서울병원 임상영양팀에 따르면 당근을 하루에 25g(중간크기 당근 1/4개 분량)을 꾸준히 섭취하면 심혈관질환의 위험이 32% 감소한다고 한다. 또한 수용성 섬유가 풍부하여 변을 부드럽게 하고 배변활동을 도와준다. 

당근. (사진=보타리친환경학교 제공)
당근. (사진=보타리친환경학교 제공)

 

그러나 당근은 자체 내 비타민 C 산화효소를 가지고 있어서 저장기간이 길수록 산화효소 활성도가 증가하고 다른 채소와 조리 시 비타민 C의 손실을 일으킨다. 따라서 오래 저장하지 않고 비타민 C가 들어간 식재료와 따로 조리하는 것이 좋다. 

베타카로틴의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껍질째 먹어야 한다. 베타카로틴이 껍질 부위에 더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 얇게 썰어 기름에 볶아서 먹어야 한다. 베타카로틴은 기름에 녹는 지용성이고 얇게 잘라야 표면적이 넓어져 베타카로틴이 잘 녹아 나오기 때문이다.  

당근의 주산지는 제주다. 제주에서도 평대를 중심으로 한 구좌읍이다. 제주는 2019년 기준 25,727톤을 생산하여 전국 생산량의 38.2%를 차지하는데 대부분은 구좌읍에서 생산된다. 제주에서 당근을 처음 재배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1970년 4.2ha, 1980년에는 494.3ha, 1998년에는 2,767ha까지 증가하였다. 이때까지 제주는 전국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값싼 중국산 당근이 수입되면서 재배면적이 계속 감소하여 2019년에는 720ha로 1998년의 1/4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당근 자급률도 2000년 94.0%에서 2018년 46.1%로 급격히 떨어졌다. 당근 수입으로 직격탄을 받은 곳이 구좌였고 이는 고스란히 자급률 저하로 이어졌던 것이다. 

수입 개방이 되면서 그나마 감귤에 대해선 FTA 자금 등 다양한 정부 지원이 이루어졌으나, 당근은 소량 재배하는 품목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수가 차별받는 것은 인간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당근으로 만든 요리. 당근채볶음(위)과 당근호두파운드케이크(아래). (사진=장태실 건강요리연구가 제공)
당근으로 만든 요리. 당근채볶음(위)과 당근호두파운드케이크(아래). (사진=장태실 건강요리연구가 제공)

식물은 추워지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분을 포도당으로 전환한다. 겨울철(12∼2월)을 견딘 당근이 다른 시기에 수확하는 당근보다 2도 이상 당도가 높다. 참고로 육지 당근은 대부분 봄에 파종하여 여름에 수확하거나 여름에 파종하여 가을에 수확한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이 우뚝 서듯 바람과 추위를 이겨낸 제주 당근이 훨씬 달고 즙이 많다. 생식용과 녹즙용 당근은 제주 유기농 당근이 최고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 작은딸이 싫어하는 유일한 채소가 당근이다. 당근 특유의 향 때문이다. 아이에게 당근 먹는 습관을 붙이기 위해 잘게 갈아 요구르트에 섞어 먹이기도 하고, 수제비 반죽할 때 물대신 당근을 갈아서 넣기도 했었다. 그래도 코가 유난히 발달한 딸은 당근이 들어간 음식을 보면 고개를 돌린다. 

보타리친환경학교에서 건강요리전문가와 당근을 뽑다가 작은딸 이야기를 했더니 당근호두파운드케익, 당근치즈케익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다. 이번 주말엔 딸아이와 상품에서 배제된 유기농 당근으로 당근호두파운드케익을 만들고자 한다.

당근을 뽑는다. 검은 땅에서 홍당무가 나오는 것이 신기하다. 어떻게 주홍색이 되었을까? 노란 가을 햇빛과 매운 하늬바람 때문일까? 한여름 씨 뿌리고 세 번이나 솎아낸 농부의 땀방울이 1억5000마리의 땅속 미생물에 떨어져 마술을 부렸을까?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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