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5일 오전, 긴급하게 이장회의 소집 문자를 받았다. 첫 회의인지라 인사도 나누고 분위기도 익힐 겸, 오후로 예정되었던 주민과의 선약을 급히 미루고 조천읍사무소로 차를 몰았다. 회의실에는 조천읍 12개 리(里) 중 8개 마을 이장들과 조천읍장을 비롯한 간부직원들이 모여있었다. 회의는 코로나19가 재확산 되는 분위기에서 마을포제와 관련한 제주도 방역 지침을 이장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천읍 12개 마을 중 9개 마을에서 해마다 정성스럽게 마을제가 봉양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육지에서는 마을제를 드리는 곳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역시 제주 마을은 뭔가 확실히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유지되어 온 제주 마을들도 이제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도 함께 올라왔다.

마을포제 코로나방역 지침 전달을 위해 모인 조천읍 이장회의 (사진=이상영 선흘2리장)
마을포제 코로나방역 지침 전달을 위해 모인 조천읍 이장회의 (사진=이상영 선흘2리장)

여지껏 나는 ‘마을’과 ‘리(里)’는 동일한 것이라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두 달 남짓이지만 마을 이장이 되고보니, 흔히들 리(里)라는 행정단위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마을회가 실제로는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당연하거니와 행정에서조차 마을(회)이 가진 여러 정체성을 서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제주에 새롭게 정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급격한 지가상승과 대규모개발에 대한 기대 등으로, 과거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했던 제주의 마을과 마을회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마을회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정체성과, 각 정체성을 대표하는 구성원인 ‘주민’과 ‘리민’의 차이점과 특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마을회가 가진 첫 번째 정체성은 우선 보조행정기관의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이때 마을회의 구성원은 ‘리(里)’라고 불리는 법적인 행정단위에 ‘주민등록을 두고 있는 모든 주민’을 의미하며, 마을회는 상급기관인 시나 도의 알림사항 등을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창구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마을회라는 조직이 없다면 동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간범위가 넓고 인구가 적은 촌락지역 곳곳에 행정력이 미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능과 역할 때문에 행정에서는 마을이장과 사무장에게 소정의 활동비와 리행정운영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는 행정이 최소한의 관리비용으로 마을(회)를 행정보조 및 통제 수단으로 이용하며, 국가가 주민들에게 당연히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책임을 쉽게 떠넘기고 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이같은 현재의 시스템이 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던 일제 강점기와 독재정권 시대의 잔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을회는 비영리 사단법인 성격을 띤 자치조직으로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때 마을회는 법적인 규정을 따르는 행정단위가 아니라, 자체 규약(향약)을 우선으로 하는 민간단체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마을회가 규정하는 ‘리민’이란 법적인 ‘주민’ 모두를 포함하지는 않으며, 실거주여부, 거주기간, 리운영비 납부 등 마을회가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구성원을 말한다. 제주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마을회라는 비영리 민간단체는 예로부터 공동으로 소유해 온 재산(부동산, 현금 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사업장이 존재해 왔기에, 이주민이 증가하는 요즘에 더 까다로운 자격을 요구하는 마을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의 수가 적고 오랫동안 한 마을에 살아가며 대부분 공통적인 산업(농업 또는 어업)에 종사하며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과거에는 위에서 설명한 마을회가 가진 두가지 정체성이 서로 충돌할 소지가 적었다. 당시에는 리(里)라고 불리는 행정조직상의 ‘주민’과 마을회라는 자치단체 구성원인 ‘리민’이 거의 일치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주민이 곧 리민이었다. 하지만 최근 제주에 새로 정착한 이주민들의 증가로 법적인 의미인 ‘주민’과 마을회의 구성원인 ‘리민’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농업과 목축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선흘2리도 최근 농업 인구 비율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식당, 카페, 숙박업 등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주민 비율이 높아졌다. 이같은 주민구성의 변화로 마을회의 정체성과 역할 역시 자연스럽게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급격한 변화로 인해 최근 제주 마을 이곳저곳에서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오랫동안 지켜온 마을 문화가 새로 정착한 주민들을 배척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고, 새로 정착한 주민들은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공동체 문화를 시대에 뒤떨어진 악습쯤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광풍처럼 불어닥친 구조적 변화에 우리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마을 갈등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선흘2리도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과 관련해 2년간 큰 갈등을 빚었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분들이 그저 법적인 주민으로서 자격만 가지고, 마을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리민의 자격을 포기하는 현상도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을과 마을회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점차 멀어지고 있는 ‘주민’과 ‘리민’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과 새로 정착한 주민들이 마을의 공동체성을 재정의하는 토론의 장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와 코로나시대에 대규모 개발사업에 기대기보다, 소소하지만 마을의 자연환경을 지키고 보호하는 대안생태공동체로서 자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이런 새로운 발걸음에 행정이 마을(회)와 함께할 방법은 없을까? 

겨울을 이겨내고 또다시 올라오는 새싹 (사진=이상영 선흘2리장)
겨울을 이겨내고 또다시 올라오는 새싹 (사진=이상영 선흘2리장)

나른한 봄 햇살 아래에서 뾰족한 답변 없는 질문들을 이리저리 던져 본다. 던져진 질문들이 언젠가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워 낼 수도 있으리라는 작은 믿음으로!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 마을회장 이상영 씨는 '20년간 학교에서 지리와 사회를 가르치다 제주로 이주한 지 3년째인 초보 제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년 전에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이 된 후, 최근 이장으로 선출·임명되었다. 1973년생인 이상영 이장의 고군분투 마을공동체회복기를 매달 1회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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