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31일 볼티모어 폭동 당시 흑인 사망 시위 경찰 방어막.(사진=박노경 만나24 편집장)
지난해 5월 31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일어난 BLM 경찰 방어막.(사진=박노경 만나24 편집장)

2015년 4월 19일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가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이 볼티모어 시내에서 발생했다. 이로 인해 흑인들의 항의가 집단 행동으로 거세지면서 경찰병력과 주 방위군이 투입돼 경찰 부상 113명, 차량 144대, 건물 15채 방화로 이어졌다. 체포자는 약 400 명을 포함 한인 상가 다수가 흑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약탈 됐다.

이 사건이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사건 장소가 바로 내가 운영하던 상가 앞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가게를 넘긴지 약 10년이 지난 상태였지만 그 동네 모습은 사진처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게는 오거리 입지 좋은 곳에 있었고 가게 주변에 일명 'Complex(컴플렉스)'라고 볼티모어시에서 임대하는 아파트가 줄줄이 이어져 있는 곳이 있다. 이 곳 아파트나 타운하우스들은 우리가 상상하기 처참할 정도로 오래됐고 낡았으며, 냉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다. 대체로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4인 가구 기준 아파트 한 채가 아닌 일곱 여덟명이 한 공간에서 지낸다.

컴플렉스는 여름이면 웃통을 벗고 거리를 활보하고 겨울이면 거리 곳곳에 불을 피워 몸을 녹이는 곳이다. 이곳은 유난히 젊은 흑인 여성과 애들이 많은데 애들은 아빠가 다른 경우가 많다. 특히 젊은 남성 흑인들은 철따라 나타나는데 안 보이면 "교도소에 갔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정답이었다. 그래서인지 남자 젊은 흑인들이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게 앞은 항시 마약 딜러들이 진을 쳤고 외부에서 차를 몰고 나타난 이들이 황급히 마약을 사고선 사라지곤 했다. 지금은 거의 합법화 됐지만 당시 마리화나는 너무 흔했고 코카인을 비롯한 각종 마약 거래가 가게 앞에서 버젓이 행해졌었다. 마약 딜러들은 하도 자주 잡혀가서 얼굴이 자주 바뀌었다. 일주일에 한 번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이동 버스 진료소가 왔었고, 24시간 경찰 감시 카메라가 작동됐다. 하지만 총기 난사는 자주 발생했고, 흑인들 간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볼티모어시는 인구 70만 명 정도이다 이 도시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은 1년 기준 300건을 훨씬 웃돈다. 총격사건은 700건 이상, 인구 10만명당 살인 건수가 50명이 넘는 그야말로 ‘살벌한 도시’다. 이 살벌한 도시의 자그마한 가게들은 대부분 한인들이 운영한다. 

그로서리(Grocery)라고 불리는 동네 슈퍼, 술만 따로 파는 리쿼스토어(Liquor Store), 프라이드 치킨이 주 메뉴인 케리아웃(Carry Out) 음식점,  가발등 머리제품을 파는 뷰티 서플라이(Beauty Supply), 코인 런드리(Coin Laundry) 등등 각 코너에 자리 잡은 60년대식 가게들이 미국 이민의 시작점인 곳이다.

영어를 잘못하는데다 슬랭이라 불리우는 흑인 특유의 발음에, 흑인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상태에서 공항에 내리자 마자 바로 이 살벌한 삶의 현장에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러 나갔던 한인 1세대들. 그들에겐 흑인들과의 언쟁과 싸움은 매일 벌어지는 일상이었으며 언제 강도로 돌변할 지 모르는 이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다리 뻗고 잠을 자본 경우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흑인으로 인해 살아가지만, 흑인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로 이들이 전혀 예뻐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도 2년 반 동안 가게를 운영하면서 2번의 권총 강도를 당했고, 가게 지붕을 뚫고 내려오거나 옆 벽을 망치로 부수고 들어와서 담배나 휴대폰, 복권 등 각종 물건을 털린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위험에도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 온 1세대들은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이 곳으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경우 대략 1억 정도 자본금으로 한 달 대략 800만 원 이상 순이익을 낼 수 있다는 유혹은 떨치기 쉽지가 않다. 위험지역이니 가겟세가 싸고 거의 일을 안 하며 지내는 이들이니 은행 계좌나 신용 카드가 없어 현금으로만 돈이 들어오니 세금도 적게 낼 수 있다. 카지노 기계머신이 가계당 두 세대씩 설치돼 있어 부수입도 생긴다. 어려모로 적은 투자금으로 금방 돈을 벌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목숨을 건 비즈니스다. 항시 얼굴을 보고 지내던 손님인 이들이 복면만 쓰면 바로 강도가 되는 곳. 정부에서 지급되는 돈이 떨어지면 마약과 음식을 살 수 없고 직장은 힘들어서 못 다니는 이들. 바로 이들이 향하는 타깃이 동네 가게들이고 이웃의 선량한 시민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강도들 때문에 계산대 앞은 방탄유리로 차단 시켜놓고 조그마한 공간을 통해 물건과 돈을 주고 받곤 한다. 손님과 완전차단이라고 할까... 이 방탄유리 사이로 흑인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주인들은 아프리카로 가라고 외치며 싸우기가 일쑤다.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오면 금방 싸웠던 흑인이랑 같이 담배를 같이 피우고 다시 방탄 유리 안에 들어가서 또 싸우는 도시.

지나고 나니 어찌 그런 삶을 살아냈는지. 현재는 흑인지역 상권을 인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등 새로운 이민자 나라 그룹에서 장악해 나가고 있고 한인들은 흑인 상권에선 많이들 떠난 상태다.  

미국이 안고 있는 원죄, 노예제도가 만들어 낸 현실.

BLACK LIVES MATTER!! (블랙 라이브스 매터, BLM)***

 

***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뜻의 BLM은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비무장 상태의 흑인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는 사건에 의해 촉발됐다. 국내에선 LA이 폭동으로 알려진 1992년 4.29와 2020년 BLM 운동은 모두 미국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촉발됐다. BLM 운동은 흑인을 향한 미국의 제도적 인종차별이 28년 간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흑인 범죄화 정책에 악용된 '미국수정헌법 제13조', 흑인 거주지역 위주로 금융서비스 제한을 둔 '레드라이닝' 등 미국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 노예제 폐지로 법적 자유는 얻었지만 제도적 차별로 하층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던 흑인들. 교육부재, 실업,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고 싶어 "자신의 생명도 소중하다" 외치기 시작한 것이 BLM 운동의 본질이다. 4.29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봤던 한인들은 "We know it was injustice.(우리는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는 피켓을 들고 흑인과 연대하기도 했다. (편집자 주)

 

양영준

제주 한경면이 고향인 양영준 한의사는 2000년 미국으로 이주, 새 삶을 꿈꾸다. 건설 노동자, 자동차 정비, 편의점 운영 등 온갖 일을 하다가 미 연방 우정사업부에 11년 몸담은 ‘어공’ 출신. 이민 16년차 돌연 침 놓는 한의사가 되다. 외가가 북촌 4.3 희생자다. 현재 미주제주4.3유족회준비위원장과 민주평통워싱턴협의회 일에 참여하고 있다. 제주투데이 칼럼 [워싱턴리포트]를 통해 미국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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