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그림에 나오는 붉은 색의 바나나.
고갱의 그림에 나오는 붉은 색의 바나나.

바나나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바나나는 낙원의 과실(Musa paradisiace)이라는 학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유색인종이나 남자 성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흑인 선수에게 바나나 껍질을 던지면 체포되고, 바나나를 먹는 어린 소녀를 모델로 내세웠던 아우디사는 지탄을 받아 그 광고를 내려야만 했다.
 
바나나는 연평균 1억 1000만 톤이 생산되고 그중 2100만 톤이 교역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어 가장 많이 거래되는 과일이다. 우리나라도 연간 40만 톤 정도를 수입한다. 우리나라 대형마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과일이기도 하다. 

국민 1인당 연간 소비량이 8㎏으로 연간 쌀 소비량이 57.4㎏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양이다. 가성비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가성비 안에는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토지수탈, 노동착취, 환경파괴라는 검은 그림자들이 숨어 있다. 
 
파초과에 속하는 바나나는 식물학적으로 나무가 아니다. 부름켜가 없어 비대 성장을 못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가 줄기라고 알고 있는 것은 촘촘히 겹친 잎들의 집합이다. 

바나나는 BC 5000년에 말레이반도에서 뿌리를 먹기 위해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야생 바나나는 딱딱한 씨들이 가득해서 먹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씨 없는 3배체 돌연변이 열매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바나나 재배가 일반화되었고, 인류의 이동과 함께 열대지방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는 자급자족에 그쳤다. 

미국의 마이너 키스(Minor Keith)가 1899년 기업 UFC(United Fruit Company)를 창업하고 냉장선이라는 운반수단을 확보한 후 코스타리카에서 철도 부설권을 얻어내었다. 이때부터 바나나 플랜테이션(plantation·대규모로 단일 경작하는 농업 방식;편집자)이 시작되었다. 철도가 지나는 열대우림은 불태워져 바나나 대농장으로 바뀌었고 농민들은 임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마차도는 상상의 마을이지만 바나나 대학살 사건은 실제다. 1928년 UFC 농장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를 위협하여 군대를 보내 진압하도록 하였다. 군대는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사망자 수는 47명이었지만 마르케스의 소설에는 3000명으로 나온다.

키스는 과테말라로 ‘바나나공화국’을 확장해나갔다. 독재자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Manuel Estrada Cabrera)에게서 철도와 전신 부설권을 얻어내고 마야족을 강제 동원하여 과테말라 토지의 40% 넘는 면적에 UFC 바나나 농장을 건설하였다. 

바나나를 통한 미국의 착취와 그에 대한 민중의 항쟁을 그린 벽화.
바나나를 통한 미국의 착취와 그에 대한 민중의 항쟁을 그린 벽화.

 

에스트라다가 정권을 잡은 후부터 과테말라의 토지는 외국인과 소수 권력층에 집중되었고, 1950년에는 2%의 인구가 과테말라 토지의 70%를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1951년 국민투표로 선출된 하코브 아르벤스(Jacobo Arbnenz)대통령은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아르벤스 정부를 공산주의 정부로 규정하고, 1954년 카스티요 아르마스(Castillo Armas)대령으로 하여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아르벤스 정부는 붕괴되었고, 과테말라는 내전에 휘말려들었다. 과테말라는 내전으로 1996년까지 20만 명이 살해되는 참극을 겪었다.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이 친환경을 표방하듯, UFC는 1984년 라틴아메리카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회사 이름을 스페인어로 바꾸는데, 이 회사가 바로 ‘Chiquita Brands International’이다. 

‘Dole Food Company’는 하와이왕국의 몰락으로 생겨난 기업이다. 1893년 하와이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릴리우오칼리나(Liliuokalani)가 미국 이민자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망할 거라 생각하고 미국인 농장의 국영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자 미국 이민자들은 미 해군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미 해군은 즉시 수병 150명을 출동시켜 릴리우오칼리나를 추방하고, 샌퍼드 밸러드 돌(Sanford Ballard Dole)을 대통령으로 하는 하와이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샌퍼드 돌은 1898년 미국과 합병조약을 체결하여 하와이를 미국에 편입시켜 버렸다. 

대통령이 된 샌퍼드 돌은 사촌동생 제임스 돌(James Dole)에게 막대한 파인애플 농장을 넘겨주어 파인애플을 독점할 수 있도록 했다. 제임스 돌은 이를 바탕으로 바나나를 독점하던 회사와 합병하여 하와이 과일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Dole Food Company’는 이렇게 생겨났다. 

‘델몬트(Del Monte)’의 바나나는 대부분 필리핀에서 생산된다. 왜냐하면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배할 때 델몬트가 강제 또는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매입한 거대한 농장들을 지금까지도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은 다국적기업 치키타, 돌, 델몬트는 세계 과일시장의 3대 메이저로 등극할 수 있었다. 세계 바나나 시장은 돌이 26%, 치키다 22%, 델몬트가 15%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돌이 29%, 스미후르 23%, 델몬트 21%, 치키타가 10%를 차지하고 있다. 

바나나는 수확 후 밑동을 잘라내면 땅속줄기에서 새 줄기가 나오는데, 이 줄기를 잘라 이식한다. 이와 같이 영양생식을 통해 번식하기 때문에 30년 전 바나나와 지금의 바나나는 유전자가 같다.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대부분 캐번디시(Cavendish)이다. 

(사진=네이처)

 

1950년대까지도 향이 진하고 당도가 높은 그로스미셀(Gros Michel)이 주로 재배되었으나, TR1(Fusariim oxysporum TR1)이 일으킨 파나나병으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맛은 덜하나 파나나병의 저항성을 높인 캐번디시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캐번디시도 변종 파나나병인 TR4에는 내성이 없다. 그래서 바나나 멸종설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나나는 유전자가 동일하고 대규모 단작 재배를 하기 때문에 병충해에도 취약하다. 당연히 농약도 많이 칠 수밖에 없다. 또한 쉽게 물러지기 때문에 익지 않은 초록색 바나나를 수확해서 수입국에 도착하면 에틸렌(ethylene)가스를 이용하여 노랗게 익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부잣집에서나 맛보았던 고급 과일이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용두암에서 담임선생님이 7000원을 주고 바나나 한 손을 사서 41명의 우리 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었다. 누가바가 50원, 라면땅이 10원하던 때였다. 

그러나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로 수입개방이 되면서 바나나는 제일 값싼 과일이 되었다. 잘 나가던 제주의 바나나농가들도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 친환경 바나나를 찾는 소비자가 등장하면서 지금은 27농가가 바나나를 재배하고 있다. 

바나나의 역사와 재배 양식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미국의 해외정책이 제3세계에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 다국적기업 등의 자본에 포섭된 환경에서 지속가능한 농업은 가능한지, 자본은 자작농을 어떻게 임노동자로 전락시키는지, 생산성 제고를 위하여 종 다양성을 포기하는 것이 정말로 생산적인 것인지….

카길(Cargill), 아처 대니얼 미들랜드(ADM), 루이스 드레푸스(LDC), 가낙(Garnac), 벙기(Bubge) 등 세계 5대 곡물메이저가 국제 곡물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세계 5대 곡물메이저와 일본의 마르베니 등 일본 상사가 한국 곡물시장의 72.9%를 움켜주고 있는 상황에서 지구온난화 등으로 수입이 막혔을 때 우리의 생존은 어떻게 되는지….

오늘도 치키타 바나나는 이마트에서, 돌 바나나는 홈플러스와 롯데마트에서, 델몬트 바나나는 롯데마트에서 팔리고 있다. 어림잡아 바나나 1개는 현지에서 40원에 생산되어 마트에서 400원에 팔린다. 다국적기업과 국내 대기업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바나나에서 창출되는 잉여 95%를 가져가고 있다. 

바나나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하지만 바나나 산업을 뒤에서 조정하는 정치·경제적 권력은 악랄하면서도 세련되게 작동한다. 이 보이지 않는 악랄한 권력을 꺾을 수 있는 힘은 식품을 선택하는 소비자들의 손에서 나온다. 나를 포함한 소비자들이 ‘가성비’ 소비에서 ‘가치’ 소비로 전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나나하면 제주 유기농 바나나와 공정무역 바나나가 떠오르는 날을 기대해본다.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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