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소희 기자)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16일 행불 수형인 재심을 마친 오후 6시 30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70여년 전에 씌워졌던 빨갱이의 굴레를 비로소 벗고 진정한 명예회복 단초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저는 11살 때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도망가서 몇 개월 동안 극한의 상황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총맞아 죽을까. 굶어 죽을까. 얼어 죽을까. 그런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11살짜리가 어머님을 모시고 가장 노릇하다보니 72년이 흘렀습니다.” 4·3 군사재판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고 김응민씨 동생 김덕민씨가 재판장에서 한 말이다. 

제주지방법원 형사합의 2부(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16일 행방불명된 수형인 333명과, 생존수형인 2명 총 335명에 대한 재심 결심·선고 공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무고하게 군홧발에 짓밟힌 희생자들의 명예가 72년만에 회복된 것이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16일 오후 6시 30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70여년 전에 씌워졌던 빨갱이의 굴레를 비로소 벗고 진정한 명예회복 단초를 마련한 것”이라고 이번 재판을 평가했다. 

1948년부터 2년간 진행된 4·3 군사재판은 생존수형인 재판을 통해서도 검증된 바, 절차적 타당성을 무시한 채 제대로된 재판 형식도 없이 행해진 불법재판이다. 

영문도 모르게 잡혀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이들은 대부분 육지형무소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죄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졸속 재판이었다는 뜻이다. 남은 이들은 연좌제라는 굴레에서 고통받으며 가난과 싸워야 했다. 

유족회는 “4·3 행방불명 수형인들은 국가공권력의 불법적인 폭압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존재들”이라며 “이날 판결을 통해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과 함께 연좌제의 고통에서 살아온 유족들의 한을 다소나마 씻어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날 진행된 행불 수형인 재심은 기존 생존 수형인 재심과 달리 수형인 명부와 피고인의 일치여부, 행방불명된 피고인의 사망확인여부 등 피해 증명이 까다로웠다. 이에 재판부는 이날 "여기까지 온 것은 변호사의 공이 크다”며 재심을 맡은 문성윤 변호사를 향해 박수를 청하기도 했다.   

단일 재판 가운데 역대 최다 피고인이 법정에 섰던 이날 재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졌으며 201호 법정 안팎으로 웃음과 눈물, 박수와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군사재판을 통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희생자는 2530명이다. 이들 중 일부는 이날 명예회복을 했지만 아직까지 기회조차 갖지 못한 희생자가 더 많다. 다행히 지난달 26일 국회에서 통과한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안은 군사재판에 대해 국가에서 일관 재심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일반재판에 대해서도 특별재심이 가능하도록 개정했다. 

이에 유족회는 “앞으로 군사재판을 포함 일반재판 희쟁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추가 소송을 준비하고 적극 대응하겠다”고 했다. 

한편 재판부는 이날 일반재판에서 형사처분을 받았던 생존 수형인 고태삼, 이재훈 어르신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고태삼 어르신은 1947년 6월 6일 제주 구좌면 종달리서 열린 청년모임에 나갔다가 경찰관과 충돌하며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옥고를 치뤘다.

이재훈 어르신은 제주중학교 2학년 당시 인근 버스정류장에 있다가 '북촌리 삐라 사건'에 연루돼 인천 형무소로 끌려갔다.

실제 영장도 없이 체포된 두 어르신은 적법한 절차도 없이 경찰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한 뒤 형을 살았고, 전과자 신세로 살다가 구순이 넘은 나이가 돼서야 무죄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이날 법원앞에서 오전 11시 40분에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경찰관은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고문하고 구타했다"며 "72년 만에 맺힌 한을 풀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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