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50년.
씨 뿌리는 사람,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50년.

왕벚나무가 하얀 꽃송이를 뻥뻥 튀겨내고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그림이 생각난다. 그림의 주인공은 농부다. 씨앗을 움켜쥔 두툼한 손과 옆으로 뻗은 오른팔에서 비장한 의지가 읽힌다. 내딛는 발과 젖혀진 허리에서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풍겨 나온다. 

그늘진 농부의 얼굴에서는 그동안 쌓인 피로와 노동의 고단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리고 풀 하나 자라지 않는 황토밭과 잔뜩 흐린 하늘, 씨앗을 먹기 위해 달려들려는 까마귀 떼들이 황량함을 더한다. 

이 그림이 지난 1850년부터 1851년까지 ‘프랑스 살롱(Salon·현존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공식 전람회;편집자)’에 전시되자 큰 반향이 일었다. 하층민인 농부가 처음으로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민중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한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그림을 1987년 봄에 보았다. 여자 친구가 벚꽃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 <밀레특별전(19세기 프랑스농민화가들)>이라는 책을 펼쳐 놓았다. 그러면서 농부가 황량한 대지에 씨앗을 뿌리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나는 농부가 움켜준 씨앗이 무슨 씨인지를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봄밀이라고 답하면서 씨앗의 종류보다 그림의 주인공이 농부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부언했다. 나는 씨앗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 씨앗은 그림의 배경처럼 황폐한 그늘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씨앗으로 볼 수도 있으며, 봄밀이 아니라 보리라고 주장했다. 

단호박.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단호박.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어린 시절 어머님이 찰리(자루)를 차고 뿌렸던 씨앗은 보리, 유채, 콩, 녹두, 밭벼, 메밀 정도였다. 보리와 유채는 11월 말, 밭벼, 콩, 녹두는 6월, 메밀은 7월에 파종(논밭에 씨를 뿌리는 것;편집자)했다. 그리고 6월과 7월은 풀들이 들판을 점령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녹색이 전혀 없는 그림 속 배경은 가을일 수밖에 없고 씨앗도 한 손 가득 쥔 것으로 보아 유채가 아니라 보리라고 말했다.

보리를 파종할 즘에 그녀는 내가 유연하지 못해서인지, 암울에서 벗어나지 못해선지 더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을 찾아 떠나갔다. 그녀는 그렇게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그림과 그 그림 위로 뚝뚝 떨어지던 분홍빛 머금은 꽃잎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러다 벚꽃이 팝콘처럼 피기 시작하면 살아왔다가 눈처럼 떨어져 사라지면 돌아갔다. 

그녀가 떠난 지금도 나는 씨앗이 중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당대에만 발아가 되고, 다음 세대에는 전혀 싹이 나지 않는 터미네이터(terminator) 종자가 출시된 지 오래다. 또 특정 비료나 농약을 사용해야만 재배할 수 있는 트레일러(trailer) 종자도 개발되었다. 

세계 최대 유전자 변형작물을 연구·개발하는 다국적 농업기업인 몬산토(Monsanto)의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콩 ‘라운드업 레디(Round up ready)’를 재배하려면 라운드업(Round up) 제초제를 사용해야만 한다. 자가 채종(농작물의 종자를 채취하는 기술;편집자)하며 대대로 이어지던 종자가 다국적 기업의 이윤 창출 논리에 무너져 불임종자나 F1종자(잡종 1세대 종자;편집자) 같은 형태로 종자의 소유권이 거대기업에 넘어갔다.

지금 전 세계는 우량종자를 확보하거나 개발하기 위하여 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국제식물신품종보호연맹(UPOV) 규정에 따라 상업적으로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로열티(특정 권리를 이용하는 이용자가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 지불하는 대가;편집자)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외환위기(IMF) 당시 우리나라 5대 종묘회사 중 4곳이 다국적 기업에 합병되어 종자에 대한 재산권이 상당히 많이 넘어갔다. 

초당옥수수 아주심기.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초당옥수수 아주심기.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그래서 청양고추의 재산권도 중앙종묘의 운명과 따라 몬산토를 거쳐 독일의 다국적 제약회사인 바이엘(Bayer)로 넘어갔다. 따라서 우리나라 농민들이 청양고추를 심으려면 바이엘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고 만약 바이엘이 씨앗을 팔지 않으면 심을 수 없기 때문에 청양고추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파프리카나 토마토의 일부 종자는 g당 가격이 금보다도 비싼 가격으로 수입된다. 이는 다국적 기업들이 종자 산업에 뛰어들어 지식재산권을 사들이면서 가격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이하 농진청)에 따르면 지난 2010부터 2019년까지 외국에 지불한 로열티가 1357억원이다. 또 같은 기간 종자 수출액은 3114억원인데 수입액은 6848억원에 이른다.
 
종자전쟁은 나고야의정서(국가 간 생물자원을 활용해 생기는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 지침을 담은 국제협약;편집자)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7년에 가입하였고, 지금까지 전 세계 126개국이 비준했다. 비준국은 생물자원을 이용해 제품을 만들 경우 해당 제품 판매로 발생한 수익을 생물자원 보유국에 배분해야 한다. 생물자원 성분이 함유된 화장품과 바이오제품도 적용 대상이다.

농진청에 따르면 한국이 등록한 식물 유전자원 수는 2020년 7월1일 기준으로 26만3960개이다. 미국, 인도, 중국, 러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5위이다. 농진청이 유전자원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나고야의정서에 따른 종자전쟁 때문이다.

초당옥수수.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초당옥수수.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갈수록 심해지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 등으로 인한 식량안보와 의약품 재료로서 유전자원의 필요성도 종자전쟁이 치열해지는 원인이다. 1980년대 이후 개발된 신규 의약품 가운데 60%가 생물유전자원에서 비롯되었다. 신종플루 치료제 ‘타미플루’ 역시 중국과 베트남에서 향신료로 재배되는 스타아니스에서 추출된 것이다.

21세기는 유전자원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 농식품 시장뿐만 아니라 의약품 시장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식량주권을 지키려면 국민들도 토종종자 등 유전자원 확보와 정부의 ‘골든 씨드 프로젝트’ 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주말에는 작은딸을 데리고 보타리친환경학교에서 회원들과 함께 옥수수, 단호박, 상추, 봄 당근 등의 씨앗을 놓고 흙을 덮어 주었다. 온 우주를 품고 있는 씨앗은 껍질을 깨고 나와 뿌리를 내리고, 잎을 밀어 올리며 한 생명으로 자랄 것이다. 우리 종자산업도 역경을 딛고 일어나 농민들이 로열티 없이 종자를 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뿌리내리기를 기원한다. 

고기협.<br><br><br><br>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꾸는 필자.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말랑말랑’한 글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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