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제주목 관아 복원 전 일대 항공사진(사진=제주특별자치도 디지털콘텐츠)

지난 회 칼럼을 읽고 원도심에 사셨던 지인께서 소중한 사진 자료를 보내주셨다. 제주목 관아 복원으로 철거된 18개 동의 건축물들을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인 것 같다. 사진 좌측의 건널목 위에 있는 건물이 관덕정이다. 철거 전의 법원, 검찰청, 보건소, 세무서, 경찰국 등의 건물이 보인다. 우체국 동쪽 건물은 철거 후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건물에는 대성학원과 심지 다방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공간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면 숨은 그림을 찾듯이 찾아보길 바란다.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성주청지' 표지석 '전기통신최초도입터' 표지석(사진=고봉수 제공)

우체국 앞에는 탐라국의 전통을 이어온 '성주청지' 표지석과 제주지역 최초로 전신전화 업무가 시작된 '전기통신최초도입터'라는 표지석이 동쪽과 서쪽 끝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런데 성주청지 표지석에는 “1910년에 우편수급소가 설치되었다” 하고, 전기통신최초도입터 표지석에는 “1902년에 제주우체사가 설치되었다”라고 적혀있다. ‘제주우체사’가 ‘우편수급소’로 바꿨다는 이야기인지? 그렇다면 양쪽 모두 1902년에 제주우체사가 설치되었다고 표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한 공간에 두 가지 역사가 공존할 때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오래된 역사와 가까운 역사의 충돌!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자주 생겨날 것이다. 도정은 우체국을 매입하여 “성주청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복원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제주목 관아에서 보았듯이 성주청 복원도 탐라 시대의 건축양식이 아닌 육지에 있는 고려나 조선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복원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오래된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가까운 역사는 사라져도 되는 것인지?

항공사진에서 보듯 제주목 관아 복원사업으로 모든 관공서가 떠났지만, 우체국은 유일하게 12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본래의 업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진=고봉수 제공)

부친이 운영하던 약국에서 1980년대 초에 사용하던 약 봉투를 몇 년 전에 집에서 발견했다. 그때만 해도 관덕로 주변에서는 주소가 필요 없었나 보다. 관덕정 교통대 옆(우체국 앞)이면 찾아올 수가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전화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제주시 전화국에서는 전화번호를 신청 순서대로 발급하였다고 한다. 부친의 약국은 91번째로 신청해서 전화번호가 91번이었다. 점차 전화 가입자가 늘면서 전화번호는 2091번이 되더니 2-2091번으로, 그리고 22-2091번, 722-2091번이 되었다. 약국을 폐업하면서 사라져버린 추억의 전화번호이다. 휴대전화 사용의 급증으로 가정집에 일반전화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 역시 집에 전화가 없다. 이렇게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최초의 매일 시장 터(왼쪽), 일본인이 제작한 1941년 성내지도(사진=고봉수 제공)

관덕정 앞 광장이 제주 최초의 오일시장 터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그럼 매일 시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의 동문시장? 혹은 서문시장? 아니다. 현재 우체국 동쪽 공용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 매일 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1941년 작성된 성내 지도의 우측 중앙 16번 위치에 시장이 표기된 곳이 그곳이다.

이 공간에 대한 나의 기억은 1960년대 중반의 한일여객 차고지이다. 이곳은 한짓골(중앙성당 앞 도로)을 거쳐 5.16도로(제1횡단도로)를 통해 서귀포를 운행하던 마이크로버스를 운영하던 곳이다. 마이크로버스는 신진자동차에서 생산했던 25인승의 소규모 버스로 우리나라 최초로 엔진을 실내에 집어넣고 만든 버스라고 한다.

마이크로버스는 6.25 전쟁 이후 생겨난 잉여품을 활용하여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생산되었다. 서귀포 돈내코에 사는 이모님 댁에 갈 때 나는 이 버스를 이용했었는데, 버스가 단지 교통수단만이 아닌 지금의 택배 역할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사님에게 물건을 맡기면 받을 사람은 경유지 중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다 물건을 받는 방식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중에 추운 겨울 차고지에서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던 기사님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차고지였던 지금의 주차장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그 기억이 강하게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공간에는 1970년대에 '대성학원'이 위치하고 있었다. 1977년 중2 때 영어 실력기초를 시작으로 1980년 과외 금지 조치가 있을 때까지 방학 때마다 학원 수강을 하였다. 영어 실력기초, 성문기본영어, 성문종합영어, 수학의 정석Ⅰ, 수학의 정석Ⅱ 등 참 열심히도 다녔던 것 같다. 당시는 중학교 이상 모든 학교가 남녀 공학이 없던 시절이다. 사춘기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때라 학원에 공부하러 갔는지 여학생을 보러 갔는지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학원비를 내준 부모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드럼통 교통대'가 있던 한짓골 입구 비교 사진 왼쪽은 2020년, 오른쪽은 1950년대에 촬영한 사진이다.(사진=고봉수 제공)

부친의 약국이 한짓골 입구에 있어서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이 많다. 한짓골 입구 도로 중앙에는 70년대 초까지 ‘드럼통 교통대’(우측 사진)가 있었다. 신호등이 없던 시절 교통대 위에서 교통순경이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어릴 적에 가끔 교통대에다 소변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 나를 교통대 오줌싸개라고 놀리기도 했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중앙로 우리은행에서 교통대가 있었던 곳까지의 지형이 동산을 이뤘다고 한다. ˹증보 탐라지˼에 “사미봉은 읍내 일도리에 있으니 속명 ‘배부른 동산’이다. 구릉과 흡사하였는데 신도로공사로 인하여 평지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궁의 사거리가 140m 정도인 것을 고려한다면 군사들이 관덕정에서 쏘아 올린 화살의 과녁은 배부른 동산의 전면인(좌측 사진) 좌측 가로등 정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짓골 입구에는 초등학교 시절 매년 학기 초가 되면 동아전과나 표준전과를 사러 갔었던 우생당이 있다. 좌측 사진 안의 노란색 간판에 “우생당”이 보인다. 우생당은 1945년에 설립되어 현재 3대째 운영하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6·25전쟁 중 많은 피난민이 들어왔을 때 우생당은 문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계용묵 선생은 매일 우생당에 들렀다고 한다.

우생당 건물을 보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3층 건물이 2동, 4층 건물이 2동인 총 4동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상업지역에서는 이런 공동벽체 방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원도심을 다니다 보면 한 건물에 계단이 여러 개인 공동벽체 건물들을 쉽게 볼 수가 있다. 공동벽체 건물들은 건축주가 여러 명이라 철거 후 재건축이 쉽지가 않다. 이는 공동벽체 건물들이 원도심의 도시경관을 급격하게 변하지 않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공간에 시간차에 따라 다른 기억들이 공존하고 있을 때 우리의 방안은 무엇일까?

성주청 복원 계획에서 보듯이 사료가 없는 오래된 역사와 현존하는 가까운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활용해 나갈지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한다.

고봉수.
고봉수

제주 성안(원도심)에서 태어나 5대째 사는 토박이. 고교 졸업 후 30년만인 2012년 한짓골에 있는 생가로 돌아와 보니, 과거 제주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의 침체한 모습을 보면서 도시재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관덕정 광장 주변 활성화 사업’의 주민협의체 대표로 활동했다. 2020년에는 제주목 관아를 사적공원(시민공원)으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주민청원을 도의회에 제출한 ‘원도심 활성화 시민협의체’의 대표를 맡았다. 한짓골에서 건축 관련 사무소 ‘이엠피 파트너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한라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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