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활짝 핀 전농로. (사진=신동원 제공)
벚꽃이 활짝 핀 전농로. (사진=신동원 제공)

요즘 출퇴근 길이 즐겁습니다. 사무실이 벚꽃길로 유명한 전농로에 있기 때문입니다. 퇴근길은 일부러 벚나무가 많은 길을 따라 빙 둘러서 걸어갑니다. 벚꽃이 만개한 하늘을 보며 걷다 보면 자질구레한 걱정거리는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벚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도로의 직선 구조를 양보한 씀씀이도 마음에 듭니다. 운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표지판을 살펴보면 “70살 넘은 왕벚나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쩌면 제주4·3 당시에도 이 자리에 이 나무가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벚꽃 안내판. (사진=신동원 제공)
벚꽃 안내판. (사진=신동원 제공)

지금은 벚꽃 명소가 된 전농로에도 제주4·3과 관련한 이야기가 얽혀있습니다. 1977년에 개통된 전농로는 제주농업학교가 있었던 자리에 생겨난 길입니다. 제주농업학교는 제주도 최초의 근대식 상급 교육기관입니다. 제주농업학교는 전농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한라수목원 인근으로 터를 옮겼습니다. 그 사이에 학교명도 제주고등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1907년 사립 의신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이 학교는 현재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학교가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오현단 인근 부지에 세워졌다가 1940년에 전농로 일대로 자리를 옮겨 30여 년간 인재의 요람으로 기능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4·3이 발발했던 것이지요.

제주4·3 당시 군경 토벌대는 넓은 공터와 건물을 갖춰진 학교 건물들을 주둔지로 사용하곤 하였는데요. 제주농업학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업학교에는 9연대(후에 11연대로 합편)가 주둔했습니다. 1948년 10월쯤부터 토벌대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체포하여 농업학교에 가뒀습니다. 1947년 3·1절 시위 및 3·10 파업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명목이었다고 합니다. 

최원순 제주지법 법원장, 김방순 제주지검 검사 등 법조인을 비롯해 민전 공동의장인 현경호 제주중 초대 교장, 김호진 제주신보사 편집국장 등 교육계, 언론계 인사, 공무원과 항일운동가 등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갔습니다. 오창흔이라는 의사도 구금되었는데 그 사연이 기가 막힙니다. 사연인즉 마약중독자인 군 정보참모가 아편주사를 놓아달라는 것을 거절해서 잡혀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잡혀 들어왔거나 아예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여성과 어린아이도 분별없이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출처=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출처=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천막수용소가 들어선 학교 운동장은 죽음의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악랄한 고문 취조가 자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즉결 처분’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총살할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며 “석방!”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석방은 곧 죽음을 의미한 것이죠. 

배급할 식량이 부족해 수용된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1948년 12월, 천막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불법적인 군사재판(군법회의)를 받고 전국 각지 형무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시기에 군사재판을 받은 사람의 숫자가 871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난달 26일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수형인이 된 분들에 대한 일괄재심의 길이 마련되었는데요. 이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제주4·3 당시 학살을 주도했던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에게 암살당한 곳도 바로 이 농업학교였다고 합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 손선호, 신선호, 배경용 하사관은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 2권에 나온 김익렬 연대장의 회고록에는, 당시 법정에 선 문상길 중위의 발언이 실려 있습니다. 내용이 인상적인데요.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박진경 연대장님을 사살하였으나 본인 개인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여긴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중략) 이 법정의 성격상 당연히 총살형이 선고될 것이며 우리는 그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중략)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하여주기를 부탁한다.”

제주농업고등학교 이전 기념비. (사진=신동원 제공)
제주농업고등학교 이전 기념비. (사진=신동원 제공)

한편, 제주농업학교는 해방 직후 제주도의 자치를 주도했던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의 전신)가 1945년 9월 23일 결성식이 열렸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임원진으로는 항일운동가 등 주민들의 신망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추대되었습니다. 며칠 후인 9월 28일에는 농업학교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참여하는 항복조인식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 항복조인식은 국내에서는 서울을 제외하면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제주가 그만큼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방증이었을 것입니다. 실제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본토 방어를 위해 제주도를 요새화하는 작전을 전개하는데요. 이 당시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7만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부대를 유지하기 위한 무기 등 전쟁물자도 엄청난 양이 있었겠지요. 

1946년에는 일제 잔재 교육과 파시즘 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학 운동이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이 학생운동이 학교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운동으로 확장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양과자 반대 시위(2월 10일), 1947년 3·1절 시위 등에서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제주농업학교 옛터에는 제주국제교육원, 한국토지주택공사 제주지역본부 등의 기관이 들어섰고, 주택가와 상점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학교의 옛터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흔적은 제주국제교육원 앞마당에 설치된 ‘齊州農業高等學校移轉記念碑(제주농업고등학교이전기념비)’ 표지석이 전부입니다. 벚꽃이 만개한 봄철, 전농로를 걸으며 4·3에 대해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전농로 전경. (사진=신동원 제공)
전농로 전경. (사진=신동원 제공)
신동원.
신동원.

 

신동원. 
비생산적인 지식이 정말 재밌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청년. 철학과 자연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이 있다. 남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을 동경한다. 지금은 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에 적을 두고 있다. 다크투어란 전쟁이나 테러, 재난 등 비극적 역사 현장을 찾아 성찰을 얻는 여행이다. 제주에는 신축항쟁, 일제강점기, 4·3 등과 관련한 유적이 600~800곳에 이른다. 매달 한 차례에 걸쳐 아프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품은 곳들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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